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20)
고려 전기 지방제도의 정비와 부산 고려 전기 지방제도의 정비와 부산 후삼국시대의 전개와 부산의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통일신라시대 동래군 아래에는 동평현과 기장현, 두 개의 속현을 거느렸던 부산은 후삼국 시대 왕건과 대립했던 견훤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당시 부산의 모습은 견훤이 왕건에게 절영 도산 말을 주었다는 기록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건과 견훤의 대결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신라 하대의 혼란과 함께 시작된 후삼국 시대, 부산은 왕건과 대립하던 견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태조 7년에 견훤이 절영도의 총 마총 마 한 필을 왕건에게 주었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8월에 사신을 보내어 총마를 태조에게 바치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935년 신라의 경순..
고려시대 부산의 문화와 인물 고려시대 부산의 문화와 인물 동래현 출신의 인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토성이 족이란 공간적 공동체인 땅과 혈연적 공동체인 성을 중심으로 하여 각 읍에 토착한 지배적 위치의 씨족 집단을 말합니다. 동래지역 역시 이러한 성격을 가진 5개의 성씨가 존재했으며 그중 동래 정 씨는 향리를 대표하는 호장의 직책을 세습하는 가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향리라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지방의 호족들이 아주 많이 형성되는데 그중에서 약 20여 명의 호족들을 중앙의 귀족으로 올라가게 되고 나머지 지방에서 세력을 쥐고 있는 세력들을 고려시대 때는 향리라고 칭하게 됩니다. 지금 사진을 보시면 이 사진은 동래 정 씨 시조 사당 추원사입니다. 추원 사는 부산진구 양정1동에 있는데 동래 정 씨 문중의 시조 사당입니다. 특히 동래..
고려말 부산과 대일외교 고려말 부산과 대일 외교 다음은 부산과 대일 외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국교를 정상화한 두 나라는 서로 사절단을 보내 교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침략의 피해가 컸던 조선으로는 여전히 일본의 의중을 의심하지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절충안이 제시되었습니다. 즉, 일본의 사절단은 조선의 내륙을 거쳐 한양으로 상경할 수 없게 한 것이지요. 이에 일본 사신단은 부산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부산은 일본 사신단이 머물며 외교문제를 처리하는 대일본 외교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됩니다. 사실 조선의 통신사는 에도까지 가게 됩니다. 그 대신에 일본 사신단은 한양을 가지 못하고 부산 동래밖에 오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죠. 일본 선박의 방문 일본 선박의 방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기유약조가 체결..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부산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부산 왜구의 침입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왜구라는 명칭은 원래 왜가 특정 지역을 침략한다는 뜻으로 쓰였으나 왜의 잦은 침략으로 인해 고려를 정복한 일본 해적을 지칭하는 명사로 정착되었습니다. 고려 말은 왜적의 침입이 빈번하였던 시기였는데 이러한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은 최영과 이성계와 같은 무장 세력이 등장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습니다. 북로남왜의 시대라고 흔히 이야기합니다만 이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북로남왜 고려시대는 이른바 북로남왜라 불리는 외환이 중첩된 시대였습니다. 북으로는 거란, 몽고의 침략과 남으로는 왜구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습니다. 왜구는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고 무로마치 정부가 일어서는 시기, 일본 왕실이 남북조로 갈라져 혼란스러워지자 각지의 호족들이 약탈을 자..
통일신라 시대의 부산 통일신라 시대의 부산 신라의 삼국통일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라의 지방 제도 정비를 살펴보면 태종 무열왕 7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문무왕 8년 고구려가 멸망하게 됩니다. 이로써 신라는 삼한통일을 달성했으며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 이남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라 영토를 생각해 보며 삼한과 삼국 통일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우리는 신라를 삼국통일을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삼국통일이 아닌 삼한 통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역적으로도 주로 북쪽 지방은 상실되고 남쪽 지방을 차지하게 되고 나중에 후삼국시대에 후삼국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후백제라든가 후 고구려를 개칭하는 것을 보면 정서적으로도 아마 삼국통일에 대해선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생각이 ..
삼국시대, 가야연맹과 거칠산국 삼국시대, 가야연맹과 거칠산국 삼국의 시작과 가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흔히 삼국의 시작은 기원전 2세기 무렵에 압록강 중류지 일대에서 고구려가 부여족 사회를 통합하여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3세기에 이르러서는 삼한지역에서도 소국 단계를 벗어난 집권 국가 형태의 나라들이 생겨나기 시작해요. 마한지역에서는 백제가, 4세기 후반에는 진한의 사로국을 모태로 하는 신라가 나타나게 됩니다. 낙동강 중,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는 집권 국가로 성장한 앞선 나라들과 달리 구야국과 가락국을 중심으로 안라 국, 가라 국 등의 나라들이 모여 가야연맹이라는 정치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야국과 가락국은 같은 국가로 볼 수 있을 것 같고 기록에 따라서 가야국은 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기록이고 가락국은 ..
철기문화 전파와 삼한시대, 독로국과 부산 철기문화 전파와 삼한시대, 독로국과 부산 철기시대의 부산을 살펴보겠습니다. 철기 문화의 전파와 삼한시대의 전개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삼한(三韓)과 삼국(三國)의 차이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삼한 시대는 대체로 B. C. 1세기~ A.D. 3세기에 해당하며 고고학적으로는 철기시대에 해당합니다. 한반도의 철기문화는 중국의 한족(漢族)을 통해 전해졌으며 B. C 4~3세기경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삼한의 위치는 보통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의 마한, 낙동강 동쪽의 경북 지방의 진한, 낙동강 중, 하류의 경남 지방을 변한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조선의 멸망과 함께 설치된 한군현을 통해 한반도 남부로 중국의 발전한 문화가 전파되었고 고조선의 유이민들은 또한 한반도 남부로 대거 이주하게 되며 문화..
부산의 선사시대와 청동기 시대 부산의 선사시대와 청동기 시대 선사시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선사시대란 말은 그대로 역사 이전의 시대를 흔히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선사시대는 사전 시대, 선사시대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영어로 이야기하면 history 앞에 접두사 Pre를 붙여서 Prehistory라고도 합니다. 흔히 역사를 정의할 때 역(歷)과 사(史)의 한자 뜻을 새겨본다면 그 뜻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사시대 이전, 문자가 있기 이전에 기나긴 인류사는 무엇을 가지고 우리가 알 수 있느냐 하면 고고학이라든가 인류학, 생물학, 풍수학 등을 통해서 흔히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옆에 있는 그림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 탁본 자료인데 우리나라가 문자가 없는 시대의 연구를 하는데 가장 귀중한 자료입니다. 혹시나 여러분이 ..
부산의 지형과 특징, 유래 부산의 지형과 특징, 유래 부산은 삼포 지향의 도시라고 불립니다. 삼포란 산과 강과 바다를 모두 품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산과 강과 바다가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는 도시가 바로 부산입니다. 부산은 대륙과 해양을 잇는 반도에서도 모서리에 위치한 지리적 특징으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부산의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접해 있으며 서쪽은 김해와 창원, 북쪽은 양산, 북동쪽은 울산광역시와 맞닿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일본의 대마도와는 약 50km, 시모노세키와는 약 250km 떨어져 있습니다. 전체 면적은 약 770 km²이며 한 개의 군과 열다섯 개의 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017년 통계조사에 의한 부산 인구는 약 352만 명입니다. 참고로 부산을 상징하는 ..
조선시대 부산의 역, 파발제도, 봉수시설 조선시대 부산의 역, 파발 제도, 봉수 시설 부산의 역에 대해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역은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교통, 통신시설이었습니다. 역은 전국의 중요 도로에 30리마다 두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역에는 공용으로 사용하는 말과 장정(壯丁)을 두어 공무를 위해 이동하는 관리에게 편의를 제공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역전이 지급되어 있고 이걸 총 관리하는 사람을 역장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경상도 속찬 지리지》에 의하면 부산에는 휴산역과 소산 역의 명칭을 확인 할 수 있는데 휴산역은 현재의 지하철 동래역의 남쪽, 소산역은 현재의 금정구 선동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역 외에도 공무 수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원도 있었습니다. 원은 일종의 국립여관으로 부산에는 온천동의 온정원, 청룡동의 언수원, 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