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가야연맹과 거칠산국

삼국의 시작과 가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흔히 삼국의 시작은 기원전 2세기 무렵에 압록강 중류지 일대에서 고구려가 부여족 사회를 통합하여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3세기에 이르러서는 삼한지역에서도 소국 단계를 벗어난 집권 국가 형태의 나라들이 생겨나기 시작해요. 마한지역에서는 백제가, 4세기 후반에는 진한의 사로국을 모태로 하는 신라가 나타나게 됩니다. 낙동강 중,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는 집권 국가로 성장한 앞선 나라들과 달리 구야국과 가락국을 중심으로 안라 국, 가라 국 등의 나라들이 모여 가야연맹이라는 정치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런데 가야국과 가락국은 같은 국가로 볼 수 있을 것 같고 기록에 따라서 가야국은 주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기록이고 가락국은 삼국사기라든가 일본서기에 가락국으로 표현됩니다. 결국 이 나라들은 금관가야의 모체가 되는 국가들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지금 사진을 보면 제일 위쪽에 부여가 있고 그 밑에 고구려가 있습니다. 고구려, 부여가 있을 무렵의 남쪽 지방에는 바로 삼한이라는,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78개의 소국가가 형성되어 있은 것이죠. 특히 우리 부산은 소국가 중 변한에 속하게 되는데 이 변한 이 속하게 된 국가가 열두 개가 있는데 열두 개 중 지금 발견된 것은 열한 개 정도 확인이 되고 아직 한 개는 확인이 안 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옆에 있는 가야연맹의 독로국입니다. 흔히 고조선 영역에서 건국한 고구려의 위치와 한반도 남부의 상황이고 가야연맹에 속한 나라들의 이름, 위치와 부산지역에 위치했던 독로국이 표시가 되어 있습니다.
거칠산국
다음은 독로국을 계승한 거칠산국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가야연맹이 지속될 무렵 부산지역에는 과거 변한 12개국 중 하나인 독로국을 계승한 거칠산국(居柒山國)의 영역으로 추측이 됩니다. 거칠산은 '거칠뫼'로 현재의 황령산(荒嶺山)의 우리말 표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황자는 거칠 황(荒) 자이고 령은 고개 령(嶺) 자입니다. 그러니까 거친 고개, 거친 산이라는 뜻이죠. 변한 이 가야연맹으로 변환되면서 소국들의 이름이 변경된 사례가 있는데 독로국 역시 이즈음에 인근 황령산, 즉 거칠뫼의 이름을 딴 거칠산국이란 이름으로 국명을 변경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동래고등학교 앞에 있는 칠산동도 아마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거칠산국 시대의 유적으로는 복천동 고분군을 들 수 있습니다. 1969년의 첫 발굴조사 이후 약 120기에 달하는 무덤을 조사하였으며 이를 통해 복천동 고분군이 4세기 초에서 5세기 중엽까지 이 지역을 지배하던 지배층의 무덤임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고 반대편이 금정산입니다. 거칠산국이라는 국명이 모태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령산, 즉 거칠 뫼 일부가 거칠산국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복천동 고분군입니다. 이 복천동 고분군은 지금 그 자리에 야외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고 사실은 부산에서 이 지역 전체를 유적지로 확보해야 되는데 그때 예산이 부족해서 확보하지 못한 결과로 그 유적지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민가가 들어서서 대단히 안타까운 점도 남아 있습니다.
복천동 고분군 출토유물과 생활상
그다음 복천동 고분군 출토유물과 생활상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복천동 고분군은 무덤양식에 따라 나무덧널무덤, 구덩 이식 돌덧널무덤, 앞 트기 식 돌방무덤 등 다양한 무덤이 나타납니다. 복천동 고분군의 출토유물은 크게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 및 의기류(儀器類)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토기는 삼한시대의 대표적 토기인 와질토기가 사라지고 와질토기는 다른 말로 하면 연질토기라고 하죠. 900도씨로 구워내는 민무늬식 토기보다는 조금 더 고열로 구워내는 것이고 그다음에 1,200도씨의 높은 열을 가하여 만든 도질토기(陶質土器)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경질토기라고 하는데 이것은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타난 토기들입니다. 각종 항아리라든가 굽다리 접시, 원통형 항아리 받침대, 각종 동물 모양 토기, 말머리 모양 뿔잔 등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1,200도씨의 높은 열을 가하여 만든 도질토기(陶質土器)라고 합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 34호 주곽에 나온 것이고 그다음에는 복천동 고분군 11호 주실 내부가 표현되어 있고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57호 출토 굽다리 접시들입니다. 이걸 다시 좀 더 설명해보면 소형 덧널무덤 양식인 복천동 34호 모습과 다양한 토기가 출토된 11호 주실 내부의 모습인데 57호 고분에서 발군 된 굽다리 접시, 굽다리 접시는 삼국시대 가야와 신라 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아주 보편적인 토기 양식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철제유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철제무기류입니다. 고리자루 큰 칼을 환두대도라고 하는데 이것을 비롯해서 화살촉, 삼지창, 쇠창, 철검 및 갑옷류도 다수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말머리 가리개와 말 갑옷, 재갈, 안장, 발걸이 등 아주 마구류가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아주 특이한 것은 당시 화폐로 쓰였던 덩이쇠(鐵鋌), 철정이라고 하죠. 덩이쇠가 다수 출토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무덤의 주인이 권력과 부를 누렸던 지배층임을 말해주는 아주 좋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 10호에 출토 갑주입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10, 11호에 출토 갑주는 세간의 많은 주목을 받았습니다. 더구나 부곽의 갑옷 갖춤 세에 비해 주곽의 갑옷 세트는 장식성이 아주 뛰어나고 구조적으로도 편의성을 추구한 형태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부속 갑을 갖추고 있어 갑옷 역시 치레 걸이 흔히 장신구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착장자에 따른 사회적 규범이 달랐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유물입니다. 더구나 이들 갑옷 구성은 함께 출토된 말 갖춤류 마구류와 조합을 이루면서 개마무사의 위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고대 갑주 연구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유 구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금 사진은 부산 복천동 고분 30호로 출토된 쇠 화살촉입니다. 서부산 복천동 고분에서는 방어용 무기인 철제갑옷과 투구뿐만 아니라 공격용 무기인 화살촉도 풍부하게 출토되어 이들 무기 간의 상관관계를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화면은 부산 복천동 고분군 30호로 출토된 쇠 화살촉입니다. 특히 4세기 전엽에 갑옷의 철제화와 연동되어 삼각 주형 촉이 등장하게 되는데 5세기 중엽 이후 기마 전술의 본격적인 도입으로 인해 화살촉이 대량 소비되고 비행거리가 증가되는 형태이면서 가벼운 장경 촉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산 복천동 고분은 중요한 평가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그림은 복천동 고분 출토 덩이쇠입니다. 흔히 철정이라고 하죠 가야가 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으로 들 수 있는 것이 풍부한 철 생산이며 이를 증명하는 구체적인 자료가 덩이쇠입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 조에는 시장에서 중국의 동과 같이 사용되었고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철을 실물화폐처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실제적인 자료가 덩이쇠라고 추정된다는 점에서 화폐로서의 기능이 강조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무덤에 부장 된 양상에서 매지권, 위신 재적인 성격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덩이쇠 용도를 어느 한 가지로만 한정 짓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고도 생각이 듭니다. 장신구로는 금동제 보관과 금 및 금동제 귀걸이, 옥으로 만든 굽은 구슬과 유리구슬로 만든 목걸이, 유리로 만든 팔찌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금동관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복천동 고분군에 묻힌 주인공의 신분이 거칠산국의 왕족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금동관이 나오네요. 이게 부산 복천동 고분군 출토된 금동관입니다. 보물 제1922호로 지정되어 있고 부산 동래 복천동 10,11호분의 주석곽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현재 신라권에서 출토된 관 가운데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모양입니다. 금동관은 주실인 11호분의 피장자 우측에서 출토된 금동관으로, 5~6세기 신라의 출자형 금관과는 달리 대륜에 나뭇가지 모양의 수목형 입식이 연결된 고졸한 관입니다. 이 특히 출자형 금관의 초기 단계로 인정되고 있는 경주 교동 출토 금관과 가장 유사하지만 입식이 모아져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 입식 끝이 하향하고 있다는 점, 영락이 없는 대륜에 파상문이 있다는 시문인 점, 혁대를 조여 관을 쓰는 장치가 있는 점에서 아주 지역적인 특수성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형태는 5~6세기 신라관의 계보 및 가야의 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생각됩니다. 제작기법은 판재를 잘라 정으로 단순한 문양을 시문 하고, 영락을 단 매우 단순한 수법이지만, 삼국시대 고분 금속공예 기법을 잘 대변해 주고 있어 공예사적인 가치도 매우 높다고 생각됩니다. 의기류는 가지 방울, 미늘쇠, 굽은 쇠손칼, 통형동기 등이 출토되는데 이들은 모두 실제 생활에는 쓰이지 않는 비실용적인 유물로 부장자의 신분을 상징하거나 매장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복천동 고분군에서는 순장 풍습으로 보이는 사람 뼈도 함께 출토되는데 확실한 것만 해도 아홉 분 정도에 달합니다. 이는 당시 이 지방 지배층의 강한 권력과 지배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반에 걸쳐 조성된 연산동 고분군은 더 이상 묘를 조성할 공간이 사라진 복천동 고분군을 대신해 당시 거칠산국의 지배층이 조성한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연산동 고분군은 지금까지는 부산시 기념물로 지정돼있지만 최근에 이 가치가 아주 높게 평가받아서 사적으로 규정될 예정으로 있습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인골인데요. 순장자의 것으로 20세 이상의 남녀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다른 고분보다 철제무기와 갑주들이 많이 발견된 10호분에서 발견된 인골입니다. 순장자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무덤 주인의 신분이 높았음을 반증합니다. 부산에는 이 고분군이 약 30여 개 발견이 되고 있고 인골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거의 다 확실한 인골이 드러납니다. 특히 경남지역이나 부산지역에는 이 당대 사람들이 조개를 많이 먹고 조개껍질을 아마 무덤 밑에 깔은 것 같이 보입니다. 조개에서 나는 칼슘이 인의 부식을 막았기 때문에 인골이 많이 남아 있는 걸로 추정됩니다. 신라의 성장과 거칠산국의 멸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신라의 성장과 거칠산국의 멸망
신라는 4세기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낙동강 동쪽, 경북 일대를 장악하며 집권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영토 확장을 감행하여 현재의 울산, 양산, 동래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4세기 말, 신라를 공격한 백제, 가야, 왜 연합군에 맞서 고구려군의 출병을 요청하였고 이에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군 약 5만 명이 남정을 감행하여 왜군을 물리치고 가야 지방을 공격하여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 금관가야는 점차 쇠락하였고 금관가야의 영향권에 있던 거칠산국 역시 타격을 받게 되었고 신라는 5세기 초 적극적으로 남진을 시도하게 됩니다. 지금 사진을 보게 되면 신라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명 그릇과 광개토대왕 명문입니다. 신라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명 그릇을 통해 신라 영토 깊숙이 들어온 고구려 문화를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기울어진 우물 정자는 고구려군, 혹은 광개토대왕을 뜻하는 무늬로 추정이 됩니다. 신라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명 그릇과 광개토대왕 명문을 보면 '을묘년 국강 상광 개토 지호태왕호우십'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광개토대왕 호태왕을 기념하여 만든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또한 명문에 적힌 을묘년은 415년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광개토대왕이 죽은 412년에서 정확히 3년이 지난 것으로 3년 상을 치르고 난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거칠산국의 멸망과 신라의 군현 설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신라는 눌지 마립간 시기, 마립간은 옛날의 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양산인 삽량주를 신라의 영토로 편입시켰습니다. 그 증거로는 박제상의 직책이 삽량주의 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양산을 기점으로 부산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한 신라는 5세기 중반 이후 부산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5세기 중반 이후 부산에서 출토된 유물 대부분이 신라계 토기가 나오고 6세기 이후의 복천동, 연산동 고분군의 규모와 출토유물이 질적으로 하락한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신라는 법흥왕 19년에 금관 국을 정복하고 진흥왕 23년에 대가야를 멸망시키며 가야의 영토를 모두 흡수하였습니다. 신라는 거칠산군을 설치하고 대증현과 갑화량곡현을 두어 부산지역을 관할하게 됩니다. 대증현의 중심은 현재의 부산 진구 당감동으로 추정되며 갑화량곡현은 현재의 기장군으로 추정이 됩니다. 지금 사진을 보시면 김유신 장군의 영정이 있는데 김유신의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 해왕입니다. 태종 무열왕을 도와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고 완수한 김유신의 증조부는 신라의 금관가야 정복 당시 항복한 구 해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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