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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부산, 역사, 지리, 역사적 사건

고려 전기 지방제도의 정비와 부산

고려 전기 지방제도의 정비와 부산

고려 전기 지방제도의 정비와 부산
고려 전기 지방제도의 정비와 부산

후삼국시대의 전개와 부산의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통일신라시대 동래군 아래에는 동평현과 기장현, 두 개의 속현을 거느렸던 부산은 후삼국 시대 왕건과 대립했던 견훤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당시 부산의 모습은 견훤이 왕건에게 절영 도산 말을 주었다는 기록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건과 견훤의 대결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신라 하대의 혼란과 함께 시작된 후삼국 시대, 부산은 왕건과 대립하던 견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태조 7년에 견훤이 절영도의 총 마총 마 한 필을 왕건에게 주었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8월에 사신을 보내어 총마를 태조에게 바치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935년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였고 이듬해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키면서 후삼국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사진을 보겠습니다. 태조 왕건의 초상이죠. 원래 왕건은 개성지방의 토호이자 해상세력을 장악했죠. 나중에 결국 고려를 건국하는데 무력으로 건국하지 않고 지방의 많은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서 결국 왕이 된 대표적인 왕입니다. 본관은 개성이고 자는 약천입니다. 연호는 천수를 썼습니다.

고려의 초기의 지방제도

고려의 초기의 지방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에 입각해서 지방통치를 실시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지방호족 세력이 강해 결국 이러한 시도는 실현되지 못하였고 호족세력이 약화된 성종 2년에 이르러서야 지방 관제가 반포되고 대대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흔히 성종이라는 것은 시호인데 어느 나라, 중국도 마찬가지로 그 나라 문물제도를 완성했던 왕이 붙이는 시호가 보통 성종입니다. 고려도 처음에 건국할 때 대단히 혼란했지만 4대 성종 때 가서 겨우 체제가 정비되게 됩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중앙집권적 지방 통치제도를 실시하고자 했으나 지방호족들의 세력이 강성했기에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고려 초기 지방행정 제도는 주, 군, 현을 지방 호족들이 다스리는 반자치적 제도였으며 때때로 중앙에서 조세의 징수를 위한 금유, 조장, 전운사를 파견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하였습니다. 고려 초기의 지방제도는 호족세력의 강세로 인한 간접 통치였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성종 대에 이르러 지방 관제를 반포하며 전국을 12목으로 나누어 중앙관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중앙집권적인 통치제도를 실시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관을 파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종 2년, 전국을 12목으로 나누었는데 각 광주, 양주, 충주, 청주, 공주, 진주 등 전국을 12목으로 나누었고 당시 부산은 상주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성종 14년 제도를 다시 개편합니다. 서경과 동경의 2 경과 안남, 안동 등 4 도호부와 관내, 하남, 영남, 영동 등 10도로 나누고 기존의 12목은 12주 절도사로 변경하였습니다. 당시 부산은 영동도에 속했습니다. 근데 성종이 10도로 나눈 것은 그 당시에 당나라가 10도로 나누었기 때문에 당나라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최종적으로는 양광, 경상, 전라, 교주, 서해의 5도와 동계, 북계의 양계 및 군현과 촌, 소, 부곡 등의 하부 조직으로 정비하였습니다. 당시 부산은 경상도에 속했습니다. 이게 결국 10도에서 5도 양계 제로 바뀐다는 것인데 이것은 현종 때 바뀝니다. 고려시대 성종은 당나라 제도를 모방함으로써 우리나라 제도를 정비했고 현종 때 와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지방제도를 재정비합니다. 그래서 5도는 행정적인 목적이고 그다음 양계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최종적으로 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지금 그림을 보게 되면 제일 위쪽이 북계고 오른쪽이 동계로 되어 있습니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남쪽에는 양강도와 경상도, 전라도, 서해도, 교주도 등 5도가 있고 북쪽에는 서북계와 동북계의 양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고려의 5도 양계라는 지방 구역은 남쪽의 일반 행정구역과 북쪽의 군사지역으로 이원적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종 9년 실시된 지방제도 정비 과정에서 동래군은 울주의 속현인 동래현으로 전락하였고 관할이었던 동평현과 기장현 역시 인근 양산과 울주의 속현으로 바뀌었습니다. 근데 여러분 현재 우리나라는 몇 도로 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원래 우리나라 도는 성종 때 10도로 되어 있다가 그다음에 5도 양계로 바뀌고 그다음에 조선시대에 오면 태종 때 또 8도로 바뀝니다. 그러다 대한제국 때 13도로 바뀌고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때 13도로 유지하고 있다가 해방되기 직전에 제주목이 제주도로 승격해서 지금 대한민국 14도로 최종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래군의 격하와 속현의 편입

동래군의 격하와 속현의 편입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현종 9년 실시된 지방제도 정비 과정에서 동래군은 울주의 속현인 동래현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일반 군현과 달리 속현은 외관이 파견되지 않는 지역으로 이는 부산지역이 일반 군현의 지위를 상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왜 이렇게 부산의 격이 떨어졌는지 우리는 한번쯤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래군의 속현이었던 동평현은 양주의 속현이 되었고 기장현은 울주의 속현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고려 초기 부산은 주군과 속현이 해체되며 독자적 행정을 수행할 수 있는 주군의 지위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아직까지 알 수 없지만 고려 건국 이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군현의 승격이 이루어진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동래군에서는 그 반대의 이유로 격하가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동래현은 이후 속현에서 주현으로 승격하여 수령이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숙종 옹립에 공이 있었던 정황이나 인종의 총애를 받았던 정서의 고향이 동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됩니다. 사실 부산지역의 고려시대의 역사는 추측이 많은데 그 이유는 기록이 너무나 없기 때문에 사실 추측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