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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부산, 역사, 지리, 역사적 사건

고려말 부산과 대일외교

고려말 부산과 대일 외교

고려말 부산과 대일 외교
고려말 부산과 대일 외교

다음은 부산과 대일 외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국교를 정상화한 두 나라는 서로 사절단을 보내 교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침략의 피해가 컸던 조선으로는 여전히 일본의 의중을 의심하지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절충안이 제시되었습니다. 즉, 일본의 사절단은 조선의 내륙을 거쳐 한양으로 상경할 수 없게 한 것이지요. 이에 일본 사신단은 부산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부산은 일본 사신단이 머물며 외교문제를 처리하는 대일본 외교의 중심지로 변모하게 됩니다. 사실 조선의 통신사는 에도까지 가게 됩니다. 그 대신에 일본 사신단은 한양을 가지 못하고 부산 동래밖에 오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죠.

일본 선박의 방문

일본 선박의 방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기유약조가 체결되고 국교가 정상화되자 일본과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 부산은 조선을 찾은 일본 선박이 가장 먼저 입항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부산을 찾는 일본 선박은 외교와 무역을 위해 1년에 한 번 정기적으로 입항했고 그 외 비정규적인 방문도 있었습니다. 연례적으로 방문하는 선박을 세견선이라 했는데 이 세견선은 다시 국왕 사선과 쓰시마 도주선, 수도 서인선, 수직 인선으로 구분하게 됩니다. 국왕 사선은 원래 일본의 쇼군이 직접 보내는 것을 뜻했는데 이후 쇼군의 명을 받은 쓰시마 도주가 대차 왜를 파견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쓰시마 도주의 세견선은 일반적으로 연례 송사선이라 불렀는데 외교와 무역의 임무를 수행하고 진상물을 올리고 회사품을 받아 갔습니다. 수도서인과 수직 인선은 비슷한 성격의 선박이었습니다. 수도서인은 조선정부로부터 입항 도서, 즉 입항 허가서를 받은 선박을 말하는 것이며 수직 인선은 조선 정부로부터 관직을 받은 일본인이 탄 배를 말하며 본인이 직접 선박에 타고 있어야만 입항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수직 인선은 우리나라 직책을 받은 일본인들인데 이 사람들을 국가가 무상계라는 품계를 내려서 고용하기도 했습니다.

사신의 입국과 접대

다음에는 사신의 입국과 접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조선을 방문한 일본인을 접대하는 것은 동래부와 동래부사의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부산을 방문하는 일본인은 해마다 정례적으로 방문하는 연례 입국 왜인과 특별한 일이 발생했을 시 건너오는 차왜로 구분됩니다. 이러한 일본 사신단은 조선 정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일본 사선이 부산에 도착하면 두모포 만호나 개운포 만호가 이들을 해상에서 맞이하게 됩니다. 동래부사 접왜사도인데 동래부사와 부산진 청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제일 앞 가마에 탄 분이 동래부 사고 그다음 뒤에 말을 타고 오는 분이 바로 부산첨사입니다.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그림은 조선 정부를 대표하는 관리가 초량 객사로 행차하는 모습을 병풍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왜사 숙배식을 치르는 모습, 일본 사신을 위해 조선 측에서 마련한 연향의 모습 등을 한 화폭에 담은 그림입니다. 동래부사 접왜사도는 동래지역에서 활동하는 화사들에 의해 부산지역에서 생산된 그림으로서 회화사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습니다. 작자는 미상이나 화풍을 보아 변박이라는 화원이 그린 것으로 지금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후 국왕의 전패를 모신 객사에서 숙배례를 행하고 왜관 내에 있는 연향 대청(현재 부산 대청동)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이들은 조선에 체류하는 기간 내내 반드시 왜관에 머물러야 했는데 그들이 왜관에 머물 수 있는 날짜도 기유약조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왜관에 머무는 동안 조선 정부로부터 일정량의 식량과 어물, 과일 등을 지급받기도 했습니다. 동래부사 접왜사도 중 일본 사신단이 숙배례를 행하는 모습과 그들을 위해 연향을 베푸는 모습입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일본 사신단은 상경하지 못하고 부산에 있는 왜관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특히 일본 사신을 위한 연향이 베풀어지던 연향 대청이 있던 곳은 지금의 대청동이었습니다.

일본인 표류민에 대한 처우

일본인 표류민에 대한 처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와 같이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방문하는 일본인들 외에도 부산에는 배를 탔다가 난파하여 표류하여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도 있었는데 이들을 표왜(漂倭)라고 불렀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표류민을 두 종류로 분류하였는데 쓰시마 표왜(馬島漂倭)와 타도 표왜(他島漂倭)이며 각기 귀국절차가 달랐습니다. 이는 대일본 외교에서 쓰시마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선 쓰시마 표왜는 표착지에서 검문을 받고 표민수 수소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산 왜관에 인계되어 귀국 절차를 거쳤습니다. 이들이 귀국 시에는 표착한 배 1척 당 쌀 2 섬 표왜 1인당 무명 1 필씩을 주었습니다. 타도 표왜는 쓰시마에 거주하지 않는 일본인을 말하는데 이들은 표착지에서 검문을 한 후, 이들을 해로로 우암포(현재의 우암동)로 이송하여 표민수 수소에 수용하였습니다. 표민수 수소가 있던 우암동은 그림에서 보듯이 바다와 강, 산으로 들 어싸인 고립된 지형이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으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일본인의 격리를 목적으로 하는 표민수 수소가 있었고 일제 감점기에는 일본으로 수출되는 소의 전염병을 검사하기 위한 수출 우 검역소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들 타도 표 왜에게 체류하는 기간 동안 각종 음식을 지급하고 귀국 시에는 베 1 필과 양식 10말을 주었고 동래부에서는 수시로 그들을 위한 연회도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차왜, 표왜를 비롯한 조선통신사의 대접에는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고 이는 고스란히 민중들의 부담으로 돌아갔고 이는 지역 경제의 파탄으로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조선과 일본의 성신과 교린이라는 외교적 성과는 민중들의 희생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