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선사시대와 청동기 시대
선사시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선사시대란 말은 그대로 역사 이전의 시대를 흔히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선사시대는 사전 시대, 선사시대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영어로 이야기하면 history 앞에 접두사 Pre를 붙여서 Prehistory라고도 합니다. 흔히 역사를 정의할 때 역(歷)과 사(史)의 한자 뜻을 새겨본다면 그 뜻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사시대 이전, 문자가 있기 이전에 기나긴 인류사는 무엇을 가지고 우리가 알 수 있느냐 하면 고고학이라든가 인류학, 생물학, 풍수학 등을 통해서 흔히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옆에 있는 그림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 탁본 자료인데 우리나라가 문자가 없는 시대의 연구를 하는데 가장 귀중한 자료입니다. 혹시나 여러분이 가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이 암각화는 울산에 있습니다. 울산에 태화강 주류에 가면 대곡류라고 강이 있는데 그 강 지류에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국보 254호로 아주 소중한 자료입니다.
석기시대의 부산
그러면 석기시대의 부산을 살펴보겠습니다. 흔히 우리가 문자가 없는 시대를 구분을 할 때 옛날에는 삼분법으로 했습니다.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 나누었지만 석기시대가 워낙 긴 시대였기 때문에 이를 세분화해서 최근에는 석기를 구석기, 신석기로 나누기도 하고 또 구석기를 더욱 구체적으로 나누어서 전기 구석기, 후기 구석기라고 나누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가 있었다는 것은 1960년대 가서야 알려지게 되었는데요. 왜냐하면 1935년도에 일제가 우리를 지배하던 시절에 이미 함경도 동관 유적지에서 동물의 화석이 발견되었지만 그때는 구석기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우리나라의 전 지역을 조사한 결과 지금은 약 40여 군데가 발견이 됐습니다. 대표적으로 옹기 굴포리라든가 공주 석장리라든가 그다음에 평안의 상원 유적이라든가 이런 유적이 발견되어서 큰 높은 산외의 전 지역에서 발굴이 되었습니다만 우리 부산지역은 발굴이 안 되다가 1980년에 와서 발굴이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금 금정구 노포동과 해운대구 청사포에서 그 시대의 유적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1985년 노포동 유적지가 발견되고 1990년에 청사포 구석기 유적지가 발견되고 1992년에 해운대 신시가지 조성 예정지에서 구석기 유적지가 발견됨으로써 명실공히 부산도 구석기시대 인류가 살았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그 유물로는 주먹도끼라든가 찍개라든가 긁개라든가 돌날 등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 사진을 보면 위의 사진은 노포동 구석기 유적지인데 이 유적지는 구석기 유적뿐만 아니고 청동기 유물도 나오고 삼한 시대의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유물만 수습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그다음에 해운대 중동의 구석기 유적지인데 이것은 지금의 해운대 주민센터 근방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 지역에는 구석기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구석기시대의 주먹도끼인데 구석기시대 유물은 아래 사진과 같이 자연석을 인위적으로 깨뜨려서 날카롭게 만든 도구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석이 있으면 돌 두 개를 서로 부딪쳐서 파편을 선택해서 아마 주먹도끼로 사용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부산 지역의 신석기 유적
그다음에 부산 지역의 신석기 유적을 살펴보겠는데요. 보통 부산 지역의 신석기 유적지는 B. C 5,000~1,000년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개무지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지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조개무지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바다나 강가에서 조개를 먹고 버린 껍데기가 쌓여서 만들어진 것으로써 흔히 이것을 조개무덤, 패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인류는 당시 수렵, 채집 생활을 했음을 알게 해 줍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영도구 동삼동에 가면 상리, 중리, 하리가 있는데 동삼동 하리 지역에 주로 유물이 발견되었고 그다음에 영선동, 강서구의 범방동, 서구 암남동, 사하구 다대동, 가덕도 대항동, 금곡동 율리 등 아주 많습니다. 아마 이 여러 유적 중에 여러분이 분명히 한 곳에는 가봤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특히 그중에 신석기 유적지 출토유물은 토기, 석기, 골각기로 구분되는데 우리가 굳이 석기를 신석기와 구석기로 나누는 것은 이때가 되면 석기 외, 토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구분하게 되는 겁니다. 토기의 종류는 덧무늬 토기, 푸른 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 및 토우(土偶)와 각배(角杯)가 주로 출토가 됩니다. 석기로는 칼이라든가 도끼, 화살촉, 숫돌, 반달형 돌칼 등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골각기로는 화살촉, 낚시 바늘, 바늘, 이음낚시 바늘, 조개껍질 칼, 가리비 가면 등이 출토되는데 이 골각기가 나온다는 것은 이미 어로 생활을 했다는 것이고 바다 주변의 큰 고기를 잡아먹고 그 뼈를 활용해서 화살촉이라든가 바늘로 이용한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신석기인들의 생활상을 보면 움집이라든가 동굴 거주, 화덕, 바위 그늘 집 등이 있는데 움집 하면 흔히 다른 말로 하면 귀틀집이라고 부르죠. 그다음에 화덕이 발견됐다는 것은 이미 그때 불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동삼동 패총 발굴 모습이고요. 동삼동 출토 덧무늬 토기고 그다음에 동삼동 출토 빗살무늬 토기입니다. 동삼동 패총에서 발굴한 대표적인 신석기시대의 토기가 덧무늬 토기가 있고 빗살무늬 토기도 있고 덧무늬 토기는 그릇의 표면에 띠 모양의 흙을 덧붙여 무늬를 낸 토기를 말하는 것이며 빗살무늬 토기는 그릇 표면을 빗살같이 길게 이어진 무늬로 새겨서 누르거나 점이나 동그라미 등의 기하학무늬를 나타낸 신석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입니다. 흔히 이 토기를 기하학 토기라고도 부르지요. 그런데 빗살을 한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으로 볼 때 가장 사람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이 물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근데 물이 주로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지니까 비가 떨어질 때는 직선이 아니고 사선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사선으로 표현해서 빗살로 그은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청동기 시대의 부산
보통 우리 한반도에는 청동기 문화는 B.C. 1,000년 정도에서 한반도에 청동기 문화가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고 그다음에 이 청동기문화가 B.C. 6세기 정도 되면 주로 남쪽 지방까지 내려오게 되고 그다음에 4세기가 되면 북방문화와 달리 독자적인 청동기문화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산 지방은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B.C 1,000년경에 청동기문화와 민무늬 토기, 마제석기를 사용하는 인류가 등장하게 됩니다. 청동기 시대를 주도한 인류는 농경문화를 가지고 선주족(先住族)을 흡수, 동화시켰습니다. 이때 선주족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 아시아족, 바빌로니아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곰 토테미즘을 숭상한 민족이었죠. 부산에 남아있는 청동기 시대 유적과 유물을 보면 노포동에도 있고 사직동에도 있고 복천동, 온천동 등 많은 곳이 있습니다. 부산에는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바로 이 문화가 출토가 되고 있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청동기 출토의 민무늬 토기입니다. 민무늬 토기를 다른 말로 하면 무늬 없는 토기인데 빗살무늬 토기와는 달리 끝이 아주 매끈하고 아주 안정감을 주는 그런 토기입니다. 흔히 민무늬 토기는 청동기시대의 독창적인 토기로 알려져 있고 신석기시대에 유행했던 빗살무늬 토기 다른 말로 절문 토기라고 하죠. 청동기 시대에 들어오면서 점차 소멸하고 대신 각지의 다양한 모습의 무늬 없는 토기가 널리 사용됩니다. 근데 우리가 흔히 토기 이름을 붙일 때에는 시대별로 붙이는 경우가 있고 지역명을 따서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신석기시대는 빗살무늬 토기, 청동기시대는 민무늬 토기라고 이야기하지만 더 구체적으로 얘기할 때는 그 지역에 출토된 지역의 이름을 붙입니다. 예를 들면 가락리에서 나온 것은 가락리식 토기, 그다음에 넉도에서 나온 것은 넉 도식 토기라고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방명을 따게 되는 거죠.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석제 무기의 하나입니다. 청동기 시대는 청동기가 아직 일반화되지 못하고 석제가 훨씬 더 많이 사용됐던 시대입니다. 간 돌칼은 인근 중국과 일본의 경우 출토가 아주 적은데 비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출토가 많은 토착적인 석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로 고인돌이나 돌널무덤 같은 무덤 유적에서 돌 화석종과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고인돌 무덤, 돌널무덤, 독널 무덤 등이 있는데 특히 고인돌 무덤은 사람을 묻고 지석(支石)을 세우고 상석을 얻는 모양이며 부산에는 괴정동, 감천동, 사직동, 가덕도, 기장군 등 고인돌이 있지만 현재 다수는 도시 개발로 사라지고 없습니다. 근데 흔히 고인돌은 남방식, 북방식을 흔히 이야기하는데 남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받침돌이 아주 얇은 것이고 북방식은 받침돌이 아주 긴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남방식을 흔히 우리가 탁상식이라고 하기도 하고 북방식을 바둑판식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남방식은 주로 남쪽 지방에 많이 나고 북방식은 북쪽에 많이 난다고 알고 있는데 최근에 우리나라 전국적으로 보면 별 구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북방 지방에는 북방식이 나고 남방 지방에는 남방식이 난다는 것 그 의견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장 후기 형식은 독널 무덤인데 이는 커다란 독 안에 시신을 넣고 다시 다른 독을 끼워 넣어 만든 널을 묻은 무덤 양식입니다. 이러한 풍습은 철기시대까지 이어집니다. 그 예로는 오륜대, 괴정동 고분에서 우리가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사진을 보겠습니다. 기장 덕선리 고인돌이고 그다음 가덕도 두문 고인돌, 그다음 저 위쪽에 있는 익산 석천리 독널 무덤입니다. 그림에서 보듯이 자연석을 사용해서 지상 또는 지하에 매장시설을 만들고 지상에 큰 돌을 윗돌로 놓아 두께 돌로 사용하고 그것으로 동시에 유력자의 무덤의 표준을 삼는 한반도 특유의 묘재입니다. 이 묘재가 끝나고 나면 그때부터 토묘가 등장하게 되죠. 이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에 성행해서 초기 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의 일종이며 고대국가 발전의 직전의 부산지역에서는 다리가 낮거나 거의 없는 남방식 고인돌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은 토기와 석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민무늬토기는 대표적인 청동기 시대 유물이며 적갈색을 띠고 있습니다. 석기는 간석기(磨製石器), 다시 말하면 마제석기가 대표적인 유물이며 돌화살촉, 돌도끼, 반달형 돌칼, 돌창 등이 있지만 현재까지 부산지역에서 청동기 유물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근대화 과정에서 아마 유물들이 소실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김해지방에도 청동기 유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청동기 시대는 어로생활에서 농경생활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벼, 보리, 콩, 조, 피, 수수 등의 곡물이 재배되는데 벼, 보리 같은 경우는 구릉지대에서 청동기 시대에 많이 주로 재배가 되고 그다음에 조, 피, 수수 등은 해안 어로에서 신석기시대에 많이 재배된 곡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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