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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부산, 역사, 지리, 역사적 사건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부산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부산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부산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부산

왜구의 침입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왜구라는 명칭은 원래 왜가 특정 지역을 침략한다는 뜻으로 쓰였으나 왜의 잦은 침략으로 인해 고려를 정복한 일본 해적을 지칭하는 명사로 정착되었습니다. 고려 말은 왜적의 침입이 빈번하였던 시기였는데 이러한 왜구를 격퇴하는 과정은 최영과 이성계와 같은 무장 세력이 등장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습니다. 북로남왜의 시대라고 흔히 이야기합니다만 이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북로남왜

고려시대는 이른바 북로남왜라 불리는 외환이 중첩된 시대였습니다. 북으로는 거란, 몽고의 침략과 남으로는 왜구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습니다. 왜구는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고 무로마치 정부가 일어서는 시기, 일본 왕실이 남북조로 갈라져 혼란스러워지자 각지의 호족들이 약탈을 자행하며 고려의 해안까지 몰려든 무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1350년부터 해서 1392년 동안 왜구의 고려 침입 상황을 나타낸 것입니다. 결국 이 표에 나와 있는 바처럼 충정왕, 공민왕에 이르는 시기의 외부 침입 회수가 표로 나와 있듯이 우왕 시에 가장 절정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왜구가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것은 1350년부터였습니다. 이를 후기 왜구라고 부르는데 동해, 서해, 남해 연안뿐만 아니라 내륙까지 침범하였습니다. 수도인 개경 입구인 강화의 교동과 예성강 어구에까지 출몰해 개경의 치안을 위협하기도 하였으며 고려는 왜구 때문에 천도를 고려에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우왕 때는 재위 14년 동안 378회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침입해 온 왜구의 규모, 빈도, 침입한 지역과 침입하는 양식 등에 있어서 13세기 왜구와 차이가 나죠. 또한 고려의 조정뿐만 아니라 중국 연해 지방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침략하여 크게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왜구는 1370년대부터 1380년대까지 10년간 가장 치열하게 발생을 하였습니다. 부산지역 왜구 침입에 대한 기록을 보면 부산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남해 연안이었기에 다른 지역보다 그 피해가 아주 심각하였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에 보면 충정왕 2년과 공민왕 10년, 우왕 2년 7월과 11월, 12월, 우왕 3년 10월에 동래현에 왜구가 침략하였으며, 우왕 2년 12월에는 동평현에 왜구가 침입하였다고 전하여집니다. 또한 부산과 가까운 양주, 언양, 울주, 기장, 금주, 지금 김해입니다. 거창 지금 창원이고 진해, 합포, 마산입니다. 밀성(지금 밀양이죠.) 등지의 왜구의 침입의 기록까지 확대해 본다면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남 해안과 내륙 일대에 많은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가능합니다.

왜구 침입의 역사

왜구 침입에 대한 방비와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우왕 13년에는 경상도 도순문사 박위가 동래읍성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나와 있고 중수된 동래읍성의 둘레는 3,090자, 높이는 13자에 달하는 큰 규모였다고 전해집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많은 백성들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반면에 정체된 고려사회에 대한 개혁 의지가 성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욕구는 결국 왜구의 토벌과정에서 큰 명성을 얻은 이성계와 같은 신진 세력을 정계의 중앙에 등장하게 되었고 결국 조선 건국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신진사대부가 등장하게 되는 거죠. 이성계는 왜구 토벌을 통해 민심을 얻고 중앙 정계로 진출해 결국 조선을 건국하게 됩니다. 이성계가 거두었던 가장 큰 전투가 흔히 황산대첩이라고 하는데 이 황산대첩은 1380년 9월에 이성계 등이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에서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입니다. 이때 일본의 장수가 10대의 아지발도라고 아주 명성이 있는 장수였는데 결국 이성계가 아지발도 장군을 정벌하게 됩니다. 흔히 이 전투를 우리는 운봉 전투라고도 부릅니다. 지금은 황산 중터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