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0) 썸네일형 리스트형 부산의 성곽, 동래읍성 부산의 성곽, 동래읍성 임진왜란 이후 부산의 변화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동래진의 능력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지만 전쟁터가 되었던 조선의 상황은 참혹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 정부는 일본과 가장 가까운 부산의 군사적 중요성을 통감하고 부산의 경비 태세를 강화하였습니다. 효종 6년(1655)에는 경상 좌병영 관하의 경주 진관 예하의 제진이었던 동래 진을 독립시켜 양산군과 기장 현 소속의 군사까지 통합하여 지휘할 수 있게 승격시켰습니다. 숙종 16년에는 동래부사 이형상의 요청으로 직품이 감사나 병사와 대등한 종 2품의 방어사를 두어 부사의 겸무로 하였다가 영조 15년에는 부사가 동래 수성장을 겸해 독진의 군사권을 가지고 행정사무를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부산의 성곽, 금정산성과 구포 왜성 부산의 성곽, 금정산성과 구포 왜성 우선 배경을 살펴보면 금정산성은 숙종 29년(1703) 경상 감사 조태동이 동래 지역의 방비가 허술함을 지적하고 금정산에 성을 쌓도록 요청하고 허가를 받으면서 축성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동래부사 박태 항이 축성 공사를 주관하였는데 둘레 9,011자, 높이는 15자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하지만 조태동이 공사를 마치기도 전에 이임되면서 완공을 보지 못하고 방치되고 말았습니다. 숙종 17년에 당시 동래부사였던 한배하가 미완성이던 금정산성을 남, 북 두 구역으로 나누는 중성을 쌓고 장대 , 중군 소, 군기고 등의 시설을 보강하였지만 방대한 규모 탓에 산성 곳곳이 무너지며 다시 방치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그림은 여지도에 그려진 금정산성의 모습입니다. 금정산의 능.. 부산에 설치된 부곡과 향 부산에 설치된 부곡과 향 현의 하부조직인 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고려시대 군, 현의 하부조직은 촌이었습니다. 혈연관계로 만들어진 자연촌이 모여 지역촌을 이루었고 지역촌은 군과 현을 지탱하는 지지기반이 되었습니다. 일반 양민들의 거주지, 자연촌과 지역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자연촌과 지역촌 고려시대 동래현과 동평현에는 자연촌이 존재했습니다. 이러한 촌은 일반 양민들의 거주지였지만 현재 고려시대 촌락에 대한 상세한 사료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지금 사실 촌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에 있는 게 아니고 일본 나라에 정창원 문서에서 일본의 동대사의 창고인 정창원에서 자료가 발견이 됐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의 촌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자연촌이 있고 또 행정촌이 있고 이.. 임진왜란과 부산의 피해와 전투 임진왜란과 부산의 피해와 전투 다음은 이순신과 부산포 해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 진주성 대첩을 듭니다. 하지만 이곳 부산에서도 그에 필적한 전투가 있었는데 바로 부산포 해전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부산에 일본군이 처음 상륙한 곳으로 부산진, 다 대진, 동래성 전투에서 수많은 군민들이 죽거나 다쳤었죠. 그런 기억을 갖고 있던 공간인 이곳 부산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부산포에 정박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치고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조선 수군의 진격 그럼 조선 수군의 진격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비록 육지에서의 전투는 조선군의 열세였지만 해전은 그 상황이 달랐습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의 수군은 전라우도, 경상우도의 수.. 임진왜란의 발발과 부산 임진왜란의 발발과 부산 임진왜란의 발발과 경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삼포왜란은 종식되었지만 일본 역시 내부적으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무로 막 치 막부가 힘을 잃고 다이묘들의 대립으로 전쟁이 지속되는 이른바 전국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전국시대는 능력이 우선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두각을 나타낸 자가 바로 하급 신분에서 일약 일본의 지배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을 벗어나 세계를 정복하고 싶어 했습니다. 세계 정복, 영화에나 나오는 말 같겠지만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가 알고 있던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 세계는 바로 조선이었습니다. 일본의 상황 다음은 일본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467년 발생한 오닌.. 안용복과 울릉도 영토분쟁 안용복과 울릉도 영토분쟁 17세기 조선의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의식주가 해결되지 못하면 사람은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안용복이 살았던 17세기 후반의 조선은 의식주가 해결되지 못했던 시대였습니다. 한반도 역사상 손꼽히는 자연재해가 연이어 일어난 참혹한 시대였지요. 사람들은 살기 위해 국가가 정해놓은 틀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그들은 조선 정부의 공권력이 닿지 않는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깊은 산속이나 바다의 섬들이었습니다. 경신 대기근 그러면 역대 최악의 재앙, 경신 대기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경신 대기근은 1670(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 있었던 조선 역사상 최악의 기근을 말합니다. 경술년과 신해년의 앞글자를 따서 경신 대기근이라 부르며 이 기근의 결과는 파멸적이었습니다. 경.. 삼포 개항과 삼포 왜변 삼포 개항과 삼포 왜변 삼포 개항과 부산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과거 동아시아 세계에서도 외교는 국가의 중대사였습니다. 현대 세계에서 외교는 표면적으로 모든 나라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입장과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과거 동아시아의 국가들을 지탱했던 가치관은 바로 사대교린이라는 4글자였습니다. 그러면 왜구의 침략과 조, 일 외교도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왜구의 침략과 조, 일 외교 조선 왕조의 대일본 외교는 이른바 교린 외교였습니다. 교린은 사대교린에서 나온 말로 대국인 중국에 조공을 하여 책봉을 받고 책봉을 받은 나라들끼리는 우호관계를 형성하는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외교정책을 말합니다. 하지만 고려 시대부터 지속된 왜구의 침입은 조선의 건국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경부선철도 부설과 관부연락선의 취항 경부선 철도 부설과 관부연락선의 취항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계획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한 일본은 각종 근대적 조약을 강요하면서 대한제국이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 요소들을 분해시켰습니다. 즉, 일본군의 한반도 주둔을 합법화하고 외교권을 장악하고 교통, 재정, 자원 등의 소유권을 수탈하면서 결국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일정기간의 통감부 지배체제를 거친 뒤, 결국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시켰습니다. 이번에는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돌리고 싶은 그때의 그 순간,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순간으로 함께 걸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일의정서 조선과 일본은 1904년 2월에.. 조선의 국방경비체제와 부산 조선의 국방경비체제와 부산 조선 전기의 관방 체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조선 전기는 고려의 지방제도와 군사제도를 거의 그대로 유지했으나 왕권이 안정되면서 과감한 군사제도의 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삼포개항으로 일본과의 교류가 늘어나며 부산은 기존의 동래현에서 동래 도호부로 승격되어 해안방어의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우선 조선 전기 관방체제에 대해 알아보고 군사편제의 변화과정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 초기 관방체제의 변화와 부산 조선 초기 관방체제의 변화와 부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전기의 군제는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아 전국을 경기좌도, 경기우도, 양광도, 서해도, 교주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로 나누고 각 도를 군사 행정과 전투를 수행하는 단위로 삼아 여기에 군사를 .. 기유약조의 체결과 부산 조선통신사 기유약조의 체결과 부산 조선통신사 국교재개와 기유약조의 체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자신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내전을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완전히 몰아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시 조선과 국교를 재개하려 합니다. 여러분도 친구와 다툰 뒤 화해를 해본 적이 한 두 번쯤은 다 있겠지요? 어땠나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감정도 그러한데 하물며 수천만의 사람이 살고 있는 국가와 국가 간의 화해는 어땠을까 짐작이 가겠죠. 종전과 국교재개 조선 건국 후, 200년 동안 지속되던 일본과의 외교는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실권을 장악하고 ..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