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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부산, 역사, 지리, 역사적 사건

임진왜란과 부산의 피해와 전투

임진왜란과 부산의 피해와 전투

임진왜란과 부산의 피해와 전투
임진왜란과 부산의 피해와 전투

다음은 이순신과 부산포 해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한산도 대첩, 행주대첩, 진주성 대첩을 듭니다. 하지만 이곳 부산에서도 그에 필적한 전투가 있었는데 바로 부산포 해전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부산에 일본군이 처음 상륙한 곳으로 부산진, 다 대진, 동래성 전투에서 수많은 군민들이 죽거나 다쳤었죠. 그런 기억을 갖고 있던 공간인 이곳 부산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부산포에 정박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치고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됩니다.

조선 수군의 진격

그럼 조선 수군의 진격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비록 육지에서의 전투는 조선군의 열세였지만 해전은 그 상황이 달랐습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의 수군은 전라우도, 경상우도의 수군과 연합함대를 조직하고 일본 수군을 물리치면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했습니다. 일본과 가장 가까운 도시인 부산은 동래성이 함락된 후 이미 일본군의 후방 병참기지가 되어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적의 수군이 부산포 방면에 머무르고 있음을 감지하고 함선을 출진시켰는데요. 이것이 바로 부산포 해전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의 침입으로 기울어가던 조선을 구한 이순신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손꼽힙니다. 생전에 이순신 장군이 쓴 '필사즉생 필생즉사' 글씨입니다. 이 문장은 그의 인생을 대변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어 지금도 우리가 많이 이용하고 있는 거죠. '죽기를 결심하면 살아나고 살기를 생각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아주 유명한 명언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 지정 연도는 1973년도에 1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데 월전 장우성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다만 장우성의 친일경력으로 표준영정 지정에 대한 취소 의견도 제시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아산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부산포해전

다음에는 부산포해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순신은 전라, 경상의 수군으로 조직된 함대를 이끌고 장림포, 하준 구미, 다대포, 서평포, 초량 목에서 승리를 거두고 부산포에 다다랐습니다. 부산포에는 크고 작은 적선 470척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함대를 보고 감히 바다로 나오지 못하고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총탄만을 쏘아댈 뿐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천자총통, 지자총통, 장군전, 피령전, 장편 전 등 각종 함산 무기를 방포하여 적선 100척을 파괴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순신은 수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육전을 금하고 가덕도를 거쳐 여수 본영으로 돌아오니 이것이 바로 부산포 해전입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부산포해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습니다. “그동안 4차례 출전하고 10번이나 접전하여 모두 승리를 거두었으나, 만약 장수와 사졸들의 공로를 말한다면 이번 부산 싸움보다 더할 것이 없다” 이렇게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순신 장군이 거느리고 온 배가 약 160여 척 됐는데 이때 일본은 100척이 파괴됐는데 그때 죽은 일본군이 부지기로 많이 사망이 됐는데 우리의 피해는 6명 정도가 사망을 하고 약 20여 명이 부상을 당한 정도입니다. 아주 피해가 미미한 거죠. 근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만호 녹도 정운 장군이 사망했다는 것이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두고 우리 부산사람들은 부산포해전보다는 부산포 대첩이라고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는데 앞으로 논의될 부분이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부산포 해전의 승리는 남해를 돌아 서해로 진격해 육지의 군대와 나란히 진격하려던 일본의 전략을 무너뜨렸고 이를 통해 전라도를 지켜내어 임진왜란의 전황을 크게 바꾸었다는 데 그 의의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부산포 해전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부산포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한 전투입니다. 이 사진을 보면 혹시 장림포, 하준 구미, 다대포, 서평포가 보이나요? 거기를 지나가면 바로 초량 목이 보입니다. 이 전투에서 앞에서 설명했듯이 일본군의 배 100여 척을 격파시킨 전투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기념하기 위해서 양력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지정하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양력 10월 5일이라는 것은 그 당시의 음력 9월 1일었거든요. 이걸 양력으로 계산하면 10월 5일이 되는 겁니다. 이런 엄청난 전과를 올린 전투를 단순히 부산포해전이라고 하기보다는 격상시키자는 겁니다. 부산시민들은 부산포해전을 부산포 대첩이라고 용어를 바꾸자고 지금 논의 중에 있습니다.

임진왜란과 부산

다음에는 임진왜란과 부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처음으로 일본군이 상륙한 도시 부산은 전쟁 기간 내내 일본군의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필연적으로 다른 어떤 지역보다 그 피해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했습니다. 심지어 일본군은 부산을 비롯한 남해안 곳곳에 일본식 성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비록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명나라와 일본 간에 진행된 휴전협정에서는 아예 한반도 남부 4개의 도를 일본에 이양하라는 조건을 달기도 했습니다. 조선만 빠진 휴전협정, 한반도 남부 4개도의 이양, 이렇게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산의 전쟁 피해

부산의 전쟁 피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부산은 가장 먼저 점령당한 지역이었습니다. 부산은 일본에서 건너오는 일본군의 첫 상륙지점이 되어 다른 어떤 지역보다 피해가 컸습니다.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벌어진 부산진, 다 대진, 동래성 전투로 인해 민가가 불에 타고 동헌, 객사, 정원루, 향교 등이 불에 타는 피해를 겪었습니다. 또한 범어사를 비롯한 각종 사찰에 있던 불교문화재가 약탈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특히 동래부사 송상현의 첩이었던 이양녀와 그녀의 여종 만개와 금 춘은 포로로 잡혀갔다가 약 18년 만에 동래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동래구를 중점으로 한 부산지역 일대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조선 정부에서는 동래구를 동래현으로 격하시키고 현령을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파견된 현령은 동래로 부임하지 못하고 양산이나 경주 등에 머물렀습니다. 이처럼 임진 정유의 7년 동안 부산과 동래지역은 사실상 일본의 영토나 다름없었고 이는 500년 뒤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을 통해 다시 재현되는 아픔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