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 개항과 삼포 왜변
삼포 개항과 부산포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과거 동아시아 세계에서도 외교는 국가의 중대사였습니다. 현대 세계에서 외교는 표면적으로 모든 나라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입장과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과거 동아시아의 국가들을 지탱했던 가치관은 바로 사대교린이라는 4글자였습니다. 그러면 왜구의 침략과 조, 일 외교도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왜구의 침략과 조, 일 외교
조선 왕조의 대일본 외교는 이른바 교린 외교였습니다. 교린은 사대교린에서 나온 말로 대국인 중국에 조공을 하여 책봉을 받고 책봉을 받은 나라들끼리는 우호관계를 형성하는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외교정책을 말합니다. 하지만 고려 시대부터 지속된 왜구의 침입은 조선의 건국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태조 5년에는 120척의 왜선이 경상도 해안 지방을 침략하여 동래, 기장, 동평현이 공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조선 정보는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무로마치 막부에 대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여 양국은 일본 국왕사와 보빙사, 통신사와 같은 외교사절단을 파견하여 관계 개선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나오는 사진을 보겠습니다. 이 사진은 영은문입니다. 영은문은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입니다. 영은과 모화라는 이름에서 당시 조선이 명나라에 대해 갖고 있던 사대 정신의 성격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삼전도비
1639년 만들어진 비석으로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공덕비입니다. 서울 송파구 석천동에 있죠. 두 유적을 통해 명과 청의 상반된 두 국가에 사대해야 했던 조선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비문들입니다. 다음에는 삼포 개항과 쓰시마 정벌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정부는 바다를 건너오는 왜인에게 관직을 주기도 하고 이런 사람들을 이루는 것을 수지 왜인이라 합니다. 귀화를 원하는 왜인, 흔히 항화 왜인이라 그러죠, 에게는 토지와 집을 주어 생활케 했으나 조선으로 건너오는 왜인들의 수가 워낙 많고 그들이 머물 곳이 여의치 않자 결국 태종 7년 동래 부산포와 웅천 내이포를 일본인이 머물 곳으로 지정하고 왜인들을 회유코자 했습니다. 그래서 흔히 우리 대한민국의 개항을 1876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근대적인 경향이고 훨씬 이전 1407년에 부산포는 이미 개항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선 정부의 이러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숫자가 줄지 않자 결국 세종 원년 왜구의 소굴로 알려진 쓰지 마 정벌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부산포와 내이포는 폐쇄되고 양국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쓰시마 도주 소 사다모리의 사죄와 통교 재개 간청으로 세종 5년에 부산포와 내이포를 개항하고 세종 8년에는 울산 염포의 삼포를 개항하게 된 것입니다.
부산포 왜관과 항거
부산포에 왜관이 처음 설치된 것은 태종 7년 부산포의 개항 때로 추정됩니다. 부산포 왜관이 있던 곳은 현재의 자성대 서북쪽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조선 초기 설치된 왜관은 왜구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책으로 실시된 것이므로 개항장에 왜관을 설치하여 무역 및 행정, 접대 등의 업무를 맡게 하였습니다. 또한 상격 하는 왜인들을 위해서 한양에는 따로 동평관을 설치해 숙소로 사용케 하였습니다. 이처럼 삼포 개항과 함께 설치된 왜관은 임진왜란 이후 설치된 왜관에 비해서 그 규모가 작았고 행정업무의 성격도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는 전쟁 이후 일본 국왕사나 차왜의 상경이 금지되며 부산이 대일본 외교의 전반적인 업무를 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관이 설치되자 부산포로 들어온 왜인들이 불법적으로 정착하여 생활하는 이른바 항거 왜가 생겨났고 그들이 머무르는 곳을 왜리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항거 왜들은 세종 22년에는 무려 60여 호나 되었고 성종 6년에는 88호에 350명의 항거 왜가 부산포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항거 왜의 숫자가 늘어나자 폐단이 발생하였습니다. 왜인들은 무기를 들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부녀자를 겁탈하기도 하고 불법 고리대를 놓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불법으로 왜관 근처의 공, 사전을 점유하여 경작하였는데 조선 정부에서는 이러한 항거 왜들의 횡포에 미온적으로 대처하여 항거 왜들의 폐단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과거 부산포는 갈매가가 넘나드는 한적한 어촌마을이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신단의 상경이 금지되면서 대일본 외교에서 부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부산은 조선의 중요 항구로 변모하게 됩니다.
삼포 왜변
조선과 일본은 서로 교린 하는 사이였지만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한 가치관에 따라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겠지요. 삼포 개항의 결과로 조선으로 들어와 있던 왜인들은 점차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선 정부는 이러한 문제를 국가 간의 문제로 공론화시키지 못하고 소극적인 대처로 단순히 조선과 일본의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것을 막기 급급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비롯되었지요. 그러면 구체적으로 삼포 왜변 직전의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연산군, 중종 시기 삼포 항거 왜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불법적으로 벌목을 하거나 왜료를 탈취하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녹도 만화를 살해하고 민가를 습격하여 살인, 방화를 일삼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는 소극적으로 대처하거나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쓰시마 도주에게 외교적인 항의를 하는데 그쳤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왜료라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우리나라가 일본으로 주로 수출하는 것은 곡물류입니다. 그다음에 서적이나 불경 등이었는데 이런 것을 탈취해갔고 그다음에 우리가 수입해서 들어온 것은 구리나 유황 등 이런 것들로 나라에 필수로 필요했던 무기를 만들고 화폐를 만드는데 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군역 체계가 무너져 삼포에 근무해야 할 병사들이 없거나 대리인이 등록되어 있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결국 1510년 삼포에 왜변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삼포 왜변 발발
왜인들의 폭동은 제포에서 먼저 일어났습니다. 이 제포는 내이포와 같은 곳입니다. 항거 왜들은 무리를 지어서 제포성을 공격해 함락시킨 뒤 웅천 성을 공격했습니다. 웅천 현감 한 륜은 항거 왜들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웅천 성 마저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부산포 역시 항서 왜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항거 왜들은 첨사 이우증을 살해하고 동래성으로 진격해 성을 포위하였습니다. 동래 현령 윤익복은 때마침 합류한 경상 죄 수영의 군사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함락을 면하게 됩니다. 조선 정부는 삼포 왜변의 소식을 듣고 황형을 경상좌도 방어사, 류담 연을 경상우도 방어사로 임명하고 약 2000명의 병력을 파견해 삼포 왜변을 진압을 하게 됩니다. 다음은 삼포 왜변의 결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삼포왜변의 결과 부산포에서만 군인과 민간인이 약 100명이 살해당했습니다. 또한 관청과 선박이 불에 탔고 특히 동래현의 민가 198호가 소실되고 동편현의 민가가 불에 타는 등 피해가 아주 극심했습니다. 그러자 쓰시마 도주는 재차 사람을 보내어 화의를 요청하고 삼포 왜변에 가담했던 왜인들의 목을 베어 보내오는 등 성의를 보여 중종 7년 임신약조를 맺고 통교를 재개했습니다. 사실 임신약조는 그전에 맺은 계회 약조를 반으로 축소한 겁니다. 예를 들면 세견선을 50척을 25척으로 나누고 그다음 세사미두를 원래 200개에서 100개로 낮춰서 조약을 맺은 겁니다. 그러나 중종 39년 일본 해적선이 사량진을 약탈하자 다시 교섭은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이후 명종 2년 정미약조를 체결하고 동래현을 동래 도호부로 격상시켜 일본 사진의 접대를 맡게 하였지만 크고 작은 왜변은 계속해서 발생하였습니다. 정미약조는 임신약조를 좀 더 구체화시킨 약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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