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발발과 부산
임진왜란의 발발과 경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삼포왜란은 종식되었지만 일본 역시 내부적으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무로 막 치 막부가 힘을 잃고 다이묘들의 대립으로 전쟁이 지속되는 이른바 전국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전국시대는 능력이 우선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두각을 나타낸 자가 바로 하급 신분에서 일약 일본의 지배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을 벗어나 세계를 정복하고 싶어 했습니다. 세계 정복, 영화에나 나오는 말 같겠지만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가 알고 있던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 세계는 바로 조선이었습니다.
일본의 상황
다음은 일본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467년 발생한 오닌의 난, 오닐의 난은 쇼군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슈 고다이 묘들의 대립이 얽히면서 11년간이나 지속된 내란이었습니다. 이걸 계기로 100년간의 전국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혼란이 지속되자 지방 신흥 무사집단은 구세력인 슈고다이묘를 대신해 자립하며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하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혼란기를 종식시킨 이는 오다 가문의 충복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습니다. 1590년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태합에 올라 본격적인 조선 침략 의도를 드러내게 됩니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를 조선으로 보내 가도 입명, 즉 명으로 가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는 의중을 전달했습니다. 조선정부는 이러한 히데요시의 제안을 바로 거부하고 양국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 사진은 앞에 있는 사진이 오다 노부 나가이 고 뒤에 있는 사진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입니다. 알다시피 오다 노부나가는 부하였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오다의 충복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결국 일본을 통일하게 된 것이죠.
조선의 상황
다음은 조선의 상황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삼포 왜변의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이즈음 조선은 당쟁으로 조정이 분열되어 정치는 혼란스러웠고 군역 체계도 무너져 국방경비도 허술한 상태였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조선과 일본의 전쟁을 피하고자 했던 쓰시마 도주의 주선으로 황윤길과 김성일이 일본에 파견되어 정세를 살피고 왔는데 둘은 엇갈린 보고를 올려 조선 정부는 더욱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황윤길은 바로 서인이었고 김성일은 동으로 되어있는데 상반된 의견을 제시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김성일 이분이 조선시대에 뛰어난 충신 중에 한 사람인데 우리나라의 위험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날 일 없다고 과연 그렇게 보고 했을까? 하는 문제는 지금도 연구과제입니다. 아마 제가 생각으로는 김성일이 보고할 때 내부용과 외부용으로 분리시킨 게 아닌가? 만약에 국가가 대단히 어려운데 일본이 침략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을 때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과연 전쟁의 위험 때문에 감히 국가에 필요한 군역 등 이런 것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일단 안심시키기 위해서 외부적으로 전쟁의 염려가 없다고 하고 내부적으로 전쟁준비를 했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가 있겠습니다. 결국 1592년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 카토 기요마사 등이 약 2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게 됩니다.
부산진과 다대진의 함락
다음은 부산진과 다대진의 함락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일본군을 처음 발견한 이는 부산진 첨사 정발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절영도에서 일본군을 발견하고 부산 진으로 돌아와 군민들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인근 진에 구원병을 요청한 뒤 방어전에 돌입했습니다. 부산진에 도착한 일본군은 다음날 인 14일 새벽에 상륙을 감행하였습니다. 첨사 정발장군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성을 지키려 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은 함락되고 정발장군은 군인, 민중들과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때 기록을 보면 성안에 약 천여 명의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전멸하고 심지어 성안에 있었던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다 죽었다는 비참한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발장군은 지금도 초량에 가면 그의 동상이 늠름하게 서있습니다. 부산진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군사를 나누어 1대는 동래성으로 진격하고 2대는 다대진을 공격해 함락시켰습니다. 이 전투로 다대 첨사 윤흥신도 전사하였습니다. 지금 윤흥신 장군의 동상은 고관입구에 있습니다. 지금 동구청 들어가는 입구에 있고 전투를 직접 했던 모릉대쪽에는 윤공단이라는 사당이 있고 비석만 세워져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당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홍은 일본군이 밀려들자 경상좌수영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또한 울산에 주둔하고 있던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은 동래성 전투에 참여했다가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등 초반부터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그림은 1872년 지방지도에 나타난 동래성과 좌수영성, 부산진과 다대진의 모습입니다. 당시 조선시대는 제승방략에 따르면 부산진과 다대진에서 방어를 수행하는 동안 경상도 일대의 군대가 동래성이나 금정산성에 집결해야 했으나 조선군과 일본군의 압도적인 병력 차이로 인해 이러한 방어계획은 일거에 무너져버렸습니다. 제승방략 체제라는 것은 이름 하여 소방적 기능입니다. 어떠한 전투가 벌어지면 그 지역에 있는 병사를 가지고 해결하는 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병사를 다 끌어 모읍니다. 그래서 그 순간을 해결하는 게 제승방략 체제라는 것인데 이 제승방략 체제의 한계는 그 전투가 무너지면 속수무책으로 내륙이 텅텅 비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가장 큰 문제가 부산포 전투에서 제승방략 체제를 했는데 부산포 전투가 무너지니까 내륙이 텅텅 비어서 한양이 20여 일 만에 함락됐다고 하는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게 된 거죠. 임진왜란 때 부산이 함락될 위기에 빠지자 수영 성의 경상좌수사 박홍이 성을 버리고 달아난 게 앞에 기록에 나왔습니다. 이때 수영 성의 수군과 성의 주민 25명이 선서 바위에 모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고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다 목숨을 잃은 것을 기리는 장소입니다. 지금 중앙의 사당과 25인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25의 용단은 임진왜란 침략에 항거했던 부산사람들의 저항의 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래성의 항전과 함락
다음에는 동래성의 항전과 함락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동래성에 도착한 일본군은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 (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글을 내세웠습니다. 그러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戰死易 假道難)' 란 글을 쓴 목패를 보냈습니다. 결국 동래성을 포위한 일본군은 15일 새벽 성을 공격했습니다. 양산군수 조영규, 조방장 홍충관, 교수 노개 방과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결국 송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두 번 절한 뒤, 적진으로 뛰어들어 결국 목숨을 잃게 됩니다. 혈선 발이라는 것은 송 상현 공이 죽기를 결심했을 때 그의 대인 송화 공을 영결하면서 부채면에 혈서 한 16자가 전해지던 것을 조선 영조 31년에 윤봉구가 송상현공을 칭송하여 제술한 것입니다. 이처럼 송 상현 공은 결국 34세에 문인 출신으로 동래부사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워 장렬한 전사를 했다는 것은 조선 선비의 위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래서 이분을 기리기 위해서 지금 동래 충렬사에 그 당시에 같이 목숨을 잃었던 92 영위와 지금도 모셔져 있는 것입니다. 동래부순절도인데 보물 제392호인데 흔히 동래부순절도라고 하기도 하고 동래부사 순절도라고 하기도 합니다. 동래부순절도는 선조 25년 4월 15일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에서 왜군의 침략에 대응하다 순절한 부사 송상현공과 군민들의 항전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비단 바탕에 그린 이 그림은 숙종 35년 처음 그려진 것을 영조 36년 화가 변박이 보고 다시 그린 그림인데 성을 포위한 일본군의 모습과 중앙에서 북쪽을 향해 절을 하는 송상현의 모습의 보이는데 여러분 혹시 보이십니까? 저 가운데가 바로 송상현이 절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실 변박이라는 분은 동래부에 소속되어 있는 화원입니다. 이분이 일본에 통신사의 화원으로 따라갔던 동래에서 가장 대표적인 화원중에 한분이 바로 변박이라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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