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0) 썸네일형 리스트형 기유약조의 체결과 부산 조선통신사 기유약조의 체결과 부산 조선통신사 국교재개와 기유약조의 체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자신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내전을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완전히 몰아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시 조선과 국교를 재개하려 합니다. 여러분도 친구와 다툰 뒤 화해를 해본 적이 한 두 번쯤은 다 있겠지요? 어땠나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감정도 그러한데 하물며 수천만의 사람이 살고 있는 국가와 국가 간의 화해는 어땠을까 짐작이 가겠죠. 종전과 국교재개 조선 건국 후, 200년 동안 지속되던 일본과의 외교는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실권을 장악하고 .. 고려 전기 지방제도의 정비와 부산 고려 전기 지방제도의 정비와 부산 후삼국시대의 전개와 부산의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통일신라시대 동래군 아래에는 동평현과 기장현, 두 개의 속현을 거느렸던 부산은 후삼국 시대 왕건과 대립했던 견훤의 영향력 아래 있었습니다. 당시 부산의 모습은 견훤이 왕건에게 절영 도산 말을 주었다는 기록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건과 견훤의 대결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신라 하대의 혼란과 함께 시작된 후삼국 시대, 부산은 왕건과 대립하던 견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태조 7년에 견훤이 절영도의 총 마총 마 한 필을 왕건에게 주었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8월에 사신을 보내어 총마를 태조에게 바치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935년 신라의 경순.. 고려시대 부산의 문화와 인물 고려시대 부산의 문화와 인물 동래현 출신의 인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토성이 족이란 공간적 공동체인 땅과 혈연적 공동체인 성을 중심으로 하여 각 읍에 토착한 지배적 위치의 씨족 집단을 말합니다. 동래지역 역시 이러한 성격을 가진 5개의 성씨가 존재했으며 그중 동래 정 씨는 향리를 대표하는 호장의 직책을 세습하는 가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향리라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지방의 호족들이 아주 많이 형성되는데 그중에서 약 20여 명의 호족들을 중앙의 귀족으로 올라가게 되고 나머지 지방에서 세력을 쥐고 있는 세력들을 고려시대 때는 향리라고 칭하게 됩니다. 지금 사진을 보시면 이 사진은 동래 정 씨 시조 사당 추원사입니다. 추원 사는 부산진구 양정1동에 있는데 동래 정 씨 문중의 시조 사당입니다. 특히 동래.. 이전 1 2 3 4 5 6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