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선 철도 부설과 관부연락선의 취항
일본의 한반도 침략은 계획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한 일본은 각종 근대적 조약을 강요하면서 대한제국이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여러 요소들을 분해시켰습니다. 즉, 일본군의 한반도 주둔을 합법화하고 외교권을 장악하고 교통, 재정, 자원 등의 소유권을 수탈하면서 결국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 일정기간의 통감부 지배체제를 거친 뒤, 결국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시켰습니다. 이번에는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돌리고 싶은 그때의 그 순간, 일본의 한반도 침략의 순간으로 함께 걸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일의정서
조선과 일본은 1904년 2월에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습니다. 한일의정서는 과거 한반도에서 러시아가 가졌던 모든 이권을 폐기하고 일본의 군사 활동을 인정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04년 5월에는 대한 시설 강령을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한반도의 실효적 지배를 위한 일본의 행동 지침으로 일본군의 주둔 및 요충지를 확보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재정을 감독하며 경의선과 경부선 등 대한제국의 교통 및 통신기관을 장악할 것으로 척식, 즉 일본의 농민들을 이주시킬 것을 담고 있습니다. 척식이라는 것은 국외의 영토를 개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1905년 9월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강화조약을 맺은 뒤, 그 해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을사오적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헌 등은 조약에 적극 찬성했던 인물들입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 항거한 세력은 주로 의병 집단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있었던 시기 대대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었고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적으로 대규모 의병투쟁이 벌어졌습니다. 이후 강제병합 전까지 지속적인 의병투쟁이 있었지만 일본의 탄압과 토벌로 와해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한말 의병 세력은 국경을 넘어 만주와 간도 일대에서 항거를 이어갔고 이들은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운동 세력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한일, 한말 의병투쟁은 주로 양반, 선비와 같은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투쟁의 근간에는 이와 같은 일반 백성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침략에는 이와 같은 헌병경찰을 이용한 탄압과 폭력이 뒤 따랐습니다. 을사조약으로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든 일본은 가장 우선적으로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고 관부연락선을 취항시켰습니다. 특히 철도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침략의 상징이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철도를 통해 식민지로 상품을 수출하고 원료를 수탈하며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조선을 침략한 제국주의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의 목적은 조선을 통해 결국은 대륙까지 진출하는 것으로 이는 경부선 부설, 관부연락선 취항, 경의선 부설로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0년 전, 우리의 조상들은 저 기차를 타고, 저 배를 타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일본의 경부선 부설 구상은 1894년 체결한 조일 잠정합동 조관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898년 경부철도 합동 계약을 통해 경부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게 됩니다. 특히 일본은 대한제국과의 합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5차례 걸쳐 조사단을 파견하여 철도 노선을 점검하여, 점검하게 하였는데 이는 제국주의 시대 철도가 갖는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1901년 일본에서 경부철도 주식회사가 정식으로 설립하게 됩니다. 공사는 1901년 8월 20일 영등포, 9월 21일에는 종점인 초량에서 기공식이 실시되며 시작되었고, 1905년 1월 1일 영등포. 초량 간의 영업이 개시되었습니다.
1901년 부산에서 열린 경부선 철도 기공식
화면 아래 보이는 철도와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쓴 사람들의 모습에서 근대와 전근대의 공존이 엿보이게 됩니다. 뒤편의 커다란 일장기와 조그마한 태극기는 당시 대한제국이 처한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일본에게 부산은 식민지배의 시작점이자 일본과 가장 가까운 항구로 조선의 완전한 일본화를 위해 반드시 일본의 도시로 만들어야 했던 곳이었습니다. 이를 인식 속에서 부산은 경부선 철도와 관부 연락선을 통해 조선과 일본이 만나는 공간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1905년 완공된 경부선 철도의 종점은 초량역, 현재의 부산지하철 1호선 초량역입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전관거류지와 초량역이 떨어져 있고 교통도 불편하다는 이유로 초량과 현재의 중앙동을 연결하는 철도 개설 요구가 있었습니다. 결국 1905년 말 부터 부산, 아, 초량~부산 간 철도 연장 공사가 시작되어 1908년 4월 1일부터 초량~부산 간 철도 영업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기존의 경부선 종착역은 초량역에서 부산역으로 바뀌게 되고 부산의 중심은 기존의 동래 일대에서 현재의 원도심 지역으로 완전히 옮겨가게 됩니다. 다만 이때 만들어진 부산역사는 임시 건물이었습니다. 일본은 1902년과 1908년 두 차례에 걸친 매축과 영선산 착평 공사를 통해 현재의 중앙동 일대의 땅을 조성한 뒤, 이곳에 부산역을 만들었습니다. 르네상스 형식의 석조 2층 건물입니다. 1층은 역무실이었고 2층은 호텔로 사용할 수 있게 설계되었으나 1953년 부산 역전 대화재로 완전히 전소되어 버렸습니다.
1910년 초 부산역과 부산세관
매축으로 만들어진 평지에 만들어져 있으며 아직 주변 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 사이를 운항했던 연락선입니다. 부산의 '부'와 시모노세키의 한자인 하관의 '관' 자를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광복 후에는 부관연락선이라고도 불렀습니다. 1905년 9월, 일본의 국책 해운회사였던 산요 기선 주식회사에 의해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발맞추어 취항하였습니다. 관부연락선은 시모노세키와 고베를 잇는 산요선과 고베와 도쿄를 잇는 도카이도선 등을 통해 일본 내륙철도와 연결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산이 종착지인 경부선을 통해 한성으로 연결되었고 다시 경의선을 통해 신의주, 만주의 안봉선, 남만주철도, 시베리아 철도 등과 연결되어 일본 내륙에서 조선을 연 게, 조선을 거쳐 연결되는 세계일주 여행로가 일부가 완성된 셈입니다. 잔교 부두는 현재 연안여객부두 후면입니다. 사진 속에 좌측 선박이 부관연락선 제1차선 일기 환이며, 우측 해면 위로 길게 뻗어 나온 곳이 잔교 부두입니다. 1905년 경부선 철도와 관부연락선의 개통과 함께 부산은 육로와 해로의 두 가지 교통수단의 기착 및 종착역이 되면서 일본의 신민지, 식민지배와 대륙침략의 시발점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륙침략 정책의 수단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륙침략 정책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점은 취항한 연락선의 명칭 변화에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최초로 취항한 일기 환과 대마 환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섬 이름이며, 뒤이어 고려 환, 금강 환을 비롯해 조선의 국호, 궁궐 명칭, 산 이름 등과 관련된 배가 취항했습니다. 또한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천산 환, 곤륜 환 등의 중국 지명을 가진 배가 취항했습니다. 여기서 '환'은 일본어로 무슨 호를 뜻하는 말입니다. 반면에 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서를 유학생 김 마리아가 숨겨 조선으로 들어올 때 타고 왔던 배가 바로 관부연락선이기도 했습니다. 김 마리아가 숨겨온 2. 8 독립선언서는 백산상회로 전해져 3.1 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에 소지해 있는 근대 역사관에 어, 보관되어 있는 조선철도 약도입니다. 1903년 제작되었으며 당시 공사가 진행 중이던 경부선 철도의 모습과 함께 한반도를 거쳐 만주까지 이어지는 철도 노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지속된 정한론이 결국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침략 야욕에 의해 완성된 것입니다. 조선과 대륙, 즉 만주를 첫 번째 목표로 삼은 일본은 가장 시급한 교통로를 확보하려 했습니다. 약 500년 전 일본의 그러한 요구가 경부선, 경의선 철도와 관부연락선으로 기어이 관철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부산이 있었습니다. 대륙의 침략점이자 종착점이었던 부산은 그 자체로도 무척이나 중요한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일본은 부산에 무척이나 공을 들였습니다. 왜관을 전관거류지로 변화시킨 이후, 조금씩 그 영역을 넓혀가더니 결국은 과거 부산의 상징인 동래는 잊히고 일본인이 살던 부산포의 이름, 결국 지금 부산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부산은 제국주의 국가 일본의 침략 정책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그렇게 그 어떤 일본의 도시보다 일본 같은 도시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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