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산, 역사, 지리, 역사적 사건

고려시대 부산의 문화와 인물

도르레차 2022. 7. 24. 09:59

고려시대 부산의 문화와 인물

고려시대 부산의 문화와 인물
고려시대 부산의 문화와 인물

동래현 출신의 인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토성이 족이란 공간적 공동체인 땅과 혈연적 공동체인 성을 중심으로 하여 각 읍에 토착한 지배적 위치의 씨족 집단을 말합니다. 동래지역 역시 이러한 성격을 가진 5개의 성씨가 존재했으며 그중 동래 정 씨는 향리를 대표하는 호장의 직책을 세습하는 가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향리라는 것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지방의 호족들이 아주 많이 형성되는데 그중에서 약 20여 명의 호족들을 중앙의 귀족으로 올라가게 되고 나머지 지방에서 세력을 쥐고 있는 세력들을 고려시대 때는 향리라고 칭하게 됩니다. 지금 사진을 보시면 이 사진은 동래 정 씨 시조 사당 추원사입니다. 추원 사는 부산진구 양정1동에 있는데 동래 정 씨 문중의 시조 사당입니다. 특히 동래 정 씨 가문에서는 매년 4회의 향사를 지내게 되는데, 특히 한식날에는 시조인 안일호장 정회 문과 1대 정지원의 단소, 그리고 2대 정문도 묘에서 향사를 지내고, 추원사에서는 동지에 향사를 지내게 됩니다. 동래 정 씨와 정과정곡입니다. 사료를 통해 확인되는 동래현의 호장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은 정지원과 그의 아들 정문도에 관한 것입니다. 정문도에게는 정목과 정선조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특히 정목은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해 중앙관료로 진출한 인물입니다. 흔히 향리 계급은 과거에 나가지 않는다고 되어 있지만 특히 향리 중에서도 호장 계급들은 주로 과거에 많이 나왔다는 기록이 확인이 됩니다. 정목은 33세 되던 문종 26년 과거에 급제해서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며 종 3품 대부경의 벼슬에 올랐던 인물입니다. 정목은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3명은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하였습니다. 특히 넷째 아들인 정항은 23세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양광, 충청 양도의 안찰사를 역임했습니다. 정서는 정항의 아들로 의종의 총애를 받다가 역모에 얽혀서 탄핵되어 고향인 동래로 유배되었습니다. 동래로 유배된 정서는 현재의 수영강(그 당시에 사천이라고 했죠. ) 인근에 정자를 짓고 참외를 심어 스스로 호를 과정이라 짓고 임금을 그리는 심정을 읊은 정과정곡을 지었는데 한국 고전 문학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흔히 정과정곡을 잘못 읽으면 정과 정곡으로 읽는데 이것은 정과정곡으로 읽는 게 맞습니다. 정과정 공원이 있고 정과정곡 비문이 있습니다. 이 비문들은 현재 수영구, 연제구, 고려시대의 문인 정서가 마음을 담아서 1551년부터 1557년 사이에 귀양살이를 한 곳에서 각각 세워진 곳입니다. 정서가 임금이 불러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며 지은 정과정곡은 고려 가요에서 작자가 알려진 유일한 노래라는 점에서 문학사적 가치가 대단히 높습니다. 이처럼 정서와 관련된 유적은 역사학에서는 물론 국문학사에서도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유적지를 보존 관리하여 후손들에게 기리 전해야 한다는 뜻있는 사람들의 적극적인 운동이 펼쳐져 공원을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정과정 옛터는 부산교육대학교 부설 초등학교에 세운 정과 정비가 있고 그리고 연제구 연산동에는 부산의 향토 연구회인 토향회가 정과정 시비를 망미동의 강가 쪽에 세워두었습니다. 정서가 당시 정자 원두막을 짓고 유배생활을 한 자리는 수영강의 가운데 모래톱으로 지금은 수심이 깊은 강변으로 변해 있습니다. 이걸 지금 기리기 위해서 부산에는 초등학교의 이름도 과정초등학교가 됐고 정과정 거리도 있고 이 흔적을 지금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과정 유적지는 토향회가 세운 망미동 정과 정비 지역 주변을 확대한 산 6-2번지이고 이 녹지 일대를 복원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결과 유적지는 2004년 7월에 시공하여 2008년 정과정 공원으로 복원, 중건되었습니다. 사실 정과정곡은 고려사 악지에 제작 동기가 이제현의 해시가 수록되어 있고 우리말 노래는 악학궤범에 전해지는 우리나라에서 고려가요 가운데 작자가 확실한 유일한 노래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불교 사원은 면세 특권이 있는 사전을 소유하고 있으며 다양한 방법을 통한 토지 겸병을 통해 광대한 농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사원은 불보, 장생고와 같은 고려의 자본을 형성하였고 이러한 불교사원의 부패와 토지제도 문란은 고려 시대의 사회 모순을 조장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불교사원

고려시대 부산 지방에 위치했던 사찰로는 범어사를 비롯하여 국청사, 마하사, 선암사, 만덕사 등이 있습니다. 이 중 만덕사는 현재 사라지고 없는 사찰로서 고려사에 그 존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민왕 즉위년 12월에 충혜왕의 서자 석기의 머리를 깎아 만덕사에 안치시켰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고려사에 나오는 만덕사에 대한 언급입니다. 현재 부산 북구 만덕동에는 만덕사 터가 남아있는데 금당지로 추정되는 축대를 중심으로 200m 떨어진 곳에 법당 자리로 보이는 건물의 초석이 남아있고 150m 떨어진 곳에는 절의 입구에 설치하는 당간지주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만덕사의 거대한 규모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지금 보시다시피 만덕사지 터가 굉장히 큽니다. 그 이유는 고려 시절에 사찰이 지나치게 번성했다는 것인데 결국 사찰이 지나치게 번성하다 보니까 결국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의 하나를 여기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흔히 고려시대에는 사원 경제라고 해서 특히 사찰에는 엄청난 재물을 소유하게 되고 그다음에 그 재물을 지켜야 되니까 많은 승병을 거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고려 강종이 피의 숙청을 합니다. 많은 호족들을 누르고 중앙권력을 장악하면서 자기의 피의 숙청을 결국 불교를 통해서 자비를 베푼다는 의미에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승려들에게 왕사, 국사라는 제도를 두고 필요할 때마다 사찰에다가 엄청난 토지를 하사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사 원 전이라고 하는데 이 사 원 전은 세금도 면제가 되고 절에 기탁하는 일 반민 들도 수원성도라고 해서 군역을 면제받게 되는 겁니다. 이 정도로 끝난 게 아니고 자기가 사 원 전의 면세제도를 이용해서 중앙의 권문세족들이 가지고 있는 큰 땅에서 나오는 세금을 안 내기 위해서 절에다가 기탁을 합니다. 이 기탁은 실질적인 기탁이 아니고 그냥 서류상의 기탁을 하고 결국 절은 기탁받는 조건으로 약간의 뇌물을 받고 결국 권문세족들은 자기 땅의 세금을 면제받게 됨으로써 고려의 국가 경제가 마비상태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림을 보면 만덕사 발굴 모습이 보이고 만덕사지의 전경이 보입니다. 그리고 만덕사 당간지주도 보이죠. 만덕사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고려 공민왕 때 충혜왕의 서자 석기가 소군으로 머물러 있었던 사찰로 추정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발굴한 결과 기비사의 명문 기와가 다량 출토되어서 사명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실정입니다. 기비사에 대한 기록은 현재 일본 동경 국립박물관 보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대정 18년 금산 사명 향완'의 명문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명문에는 “대정 18년에 기 비사 주지 삼중대사 혜거가 동량이 되어 금산사 미륵대전에 향완 1구를 만들었다. ”라는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또한 현재의 만덕 고개를 『신 증 동국여지승람』이나 『여지도서』 등에는 기비현으로 기록돼있는 것으로 보아 기비사의 영향으로 기비현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만덕사지를 복원에 대한 계획이 세워져 있습니다만 이게 만덕사지와 기비사가 같은 곳인지 아니면 시기적으로 다른 곳인지 그다음에 이곳을 세운 사람이 누구인지 하는 문제는 철저히 고증이 되어야 하리라 생각을 합니다. 다시 살펴보면 만덕사가 고려사에 언급되어 있는 사찰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고려 초기부터 조선 전기까지 부산에 존재하였던 대사찰의 흔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지역에서 기와류와 자개류가 출토되고 있어 만덕사 전역에 대한 학술적인 발굴조사가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동래온천과 해운대

고려시대에도 동래온천과 해운대온천은 전국적으로 알려진 명소였습니다. 사실 동래온천의 기록에는 구야 온천이라고 되어 있고 해운대온천은 구남 온천으로 되어 있습니다. 온천은 원래 통일신라시대부터 아주 유명했는데 특히 통일신라의 진성여왕은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아서 몸이 아주 안 좋았는데 온천에서 목욕한 이후에 피부가 아주 좋아졌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해운대온천 같은 경우에는 청사포에는 피부병이 걸린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피부병에 걸린 사람들이 해운대에 와서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나았다는 기록도 나와 있고 또 다른 기록에 보면 중앙의 귀족이라든가 왕이 자주 온천을 찾았다는 기록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온천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대단히 힘들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중앙의 왕이라든가 귀족들의 경우에는 이분들은 식사를 대접해야 되기 때문에 자기 지역에 나는 모든 산물을 동원해서 대접하는 등 그런 고역을 치러야 되고 또 평일에는 주민 중 피부병을 앓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나을 방법이 온천밖에 없으니까 온천 주변에 다 몰리다 보니까 환경이 별로 안 좋았던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목욕문화가 발전한 오늘날에는 대단히 중요한 관광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많은 문인들이 동래온천과 해운대를 찾아서 시를 지어 남겼습니다. 특히 정포라는 사람은 충혜왕 시기, 직언을 하다 파면되어 울산으로 유배되었는데 이 시기, 동래지역을 돌아보고 많은 시를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