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시대의 부산
통일신라 시대의 부산
신라의 삼국통일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라의 지방 제도 정비를 살펴보면 태종 무열왕 7년에 백제가 멸망하고 문무왕 8년 고구려가 멸망하게 됩니다. 이로써 신라는 삼한통일을 달성했으며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 이남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라 영토를 생각해 보며 삼한과 삼국 통일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우리는 신라를 삼국통일을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삼국통일이 아닌 삼한 통일로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역적으로도 주로 북쪽 지방은 상실되고 남쪽 지방을 차지하게 되고 나중에 후삼국시대에 후삼국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후백제라든가 후 고구려를 개칭하는 것을 보면 정서적으로도 아마 삼국통일에 대해선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생각이 듭니다. 통일신라는 지방조직을 재정비하는데 신문왕 5년에 9주 5 소경을 설치하였습니다. 이후 경덕왕 16년에 고유한 주, 군, 현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개칭하였습니다. 지금 그림을 보시면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 무열왕 김춘추, 고구려를 멸망시킨 문무왕 김법민은 김춘추의 아들입니다. 신라의 통일을 가져온 김춘추와 김법민 2대에 걸쳐 완성되었습니다.
거칠산군과 동래군
경덕왕 16년 고유한 주, 군, 현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변경하며 부산지역의 명칭 역시 거칠산군에서 동래군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원래 동래구는 이름이 두 가지가 있는데 독로국에서 동래군이라고 변했다는 말이 있고 독이 나중에 어원이 변화해서 독이 동이 되고 로가 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고 중국에서 신선이 봉래산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래군이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확실하게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만 통일신라시대 동래군의 군치(郡治)는 현재의 동래지역이 아닌 현재의 수영구 망미동과 일대라 추정이 됩니다. 이는 동국여지승람에 해운포에 옛 읍성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과, 증보문헌비고 등에 '해운포는 사천 입구에 있다'라고 기록된 점을 보아 현재의 수영구 망미동 일대로 추정됩니다. 동래군은 9주의 하나인 양주의 12개 군 중 하나로 동평현과 기장현이 그 영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동래온천과 절영도, 해운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신문왕 2년 충원공이라는 재상이 동래온천을 찾아와 목욕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후 동국여지승람과 지봉유설 등에도 동래온천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태종 무열왕은 절영도를 찾아와 활쏘기를 한 적이 있으며 현재 영도의 태종대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비롯했다고 전합니다. 절영도는 현재 영도라고 하지만 이 절영도는 구한말에는 목도라고 했습니다. 절영도라는 이름은 바로 그림자가 끊긴다는 뜻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빨리 달리는 천리마인 말이 생산되기 때문에 천리마는 그림자가 안 보이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말이 생산되는 절영도란 말이 있고 섬 전체에 그림자가 비치지 않기 때문에 절영도라고 했다는 설이 지금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덕왕은 김유신의 손자 대아찬 윤 중을 불러 김유신의 업적을 이야기해주고 '절영 산마'한 필을 내려주었는데 바로 영도에서 길러진 말이라고 추측됩니다. 9세기 말 신라를 지탱하던 골품제가 붕괴되고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나자 당나라에서 귀국한 육두품 출신의 최치원은 시무십여조를 올려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실망한 최치원은 동래군 관내의 동백섬에 은거하면서 해운대란 이름도 그의 자(字)인 해운(海雲)에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이때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갔을 때 흔히 이 유학을 간 사람을 견당 유학생이라고 합니다. 즉 육두품 출신들이 당나라에 국비로 유학을 가서 당나라의 과거에 합격해서 당나라 관료로 있다가 우리나라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중에 최치원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데 돌아와서 신라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 진성여왕 때 시무십여조를 올린 겁니다. 여기서 받아들여졌다면 신라가 그렇게 어렵게 나라가 구하지 않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이 사진은 김춘추가 활을 쏘았다는 태종대 풍경입니다. 부산 기념물 제22호로 규정이 되어 있고 그다음에 이것의 전체는 부산 명승 제17조로 되어 있고 부산에서 가장 대표적인 유적지 중에 하나입니다. 또 하나 태종대는 이곳에서 조선 태종도 유람했다고 전해지고 한 발이 있을 때 동래 부사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통일신라시대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의 초상화인데요. 복식은 중국 당나라 형식으로 머리에는 복두를 쓰고 붉은색 단령을 입고 있으며 가부좌를 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손에 불자를 들고 있는 모습이나 의자 아래 신발이 놓여 있는 모습은 불교의 승려 초상화 형식을 따르고 있습니다. 최치원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고운이며 해운이란 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최치원은 그 이후에 흔적이 사라졌다가 최근에 지금 위의 그림에 보듯이 해운대라는 석각에 돌이 새겨져 있고 그것을 기려서 산 정상에 최치원의 동상도 세워놓고 거기에 관련된 유물도 전시하는 해운정도 세워져 있습니다. 꼭 한번 동백섬에 들러보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최치원은 최 씨 가문 중에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삼최의 한 사람입니다. 새로 성장하는 육두품 출신의 지식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해운대의 해운은 그의 자를 딴 것이며 지금도 해운대에는 석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