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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성곽, 금정산성과 구포 왜성

도르레차 2022. 7. 27. 07:49

부산의 성곽, 금정산성과 구포 왜성

부산의 성곽, 금정산성과 구포 왜성
부산의 성곽, 금정산성과 구포 왜성

우선 배경을 살펴보면 금정산성은 숙종 29년(1703) 경상 감사 조태동이 동래 지역의 방비가 허술함을 지적하고 금정산에 성을 쌓도록 요청하고 허가를 받으면서 축성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동래부사 박태 항이 축성 공사를 주관하였는데 둘레 9,011자, 높이는 15자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하지만 조태동이 공사를 마치기도 전에 이임되면서 완공을 보지 못하고 방치되고 말았습니다. 숙종 17년에 당시 동래부사였던 한배하가 미완성이던 금정산성을 남, 북 두 구역으로 나누는 중성을 쌓고 장대 , 중군 소, 군기고 등의 시설을 보강하였지만 방대한 규모 탓에 산성 곳곳이 무너지며 다시 방치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그림은 여지도에 그려진 금정산성의 모습입니다. 금정산의 능선을 타고 만들어진 성곽의 모습과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중성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후 몇 번의 중축 의견이 개진되었지만 성사되지 못하였고 정조 12년 작성된 비변사등록에는 금정산성이 방치된 이유와 수축에 대한 어려움이 정조와 우의정 채제공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 있습니다. 영남 어사 김이성의 청대로 동래 금정산성을 폐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좌의정 이성원의 계 중에서 우의정 채제공이 말하기를, “성이 넓으면 지키기 어려우니 병가에서 꺼리는 바입니다. 지금 이 금정산성은 주위가 거의 30리가 된다고 하니 옛날에는 쌓았다가 지금은 폐기한 것이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의 생각도 졸연히 다시 쌓기는 어렵겠다고 여기옵니다. ”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비변사등록》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금정산성이 방치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처럼 국경 방비의 중요성은 인지하면서도 성의 규모가 너무 방대하여 그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슷한 시기 만들어진 동래읍성과의 비교에서 산성보다는 평지성을 택한 당시의 국방 전략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흔히 성은 평지성이 있고 산성이 있습니다. 동래읍성을 엄격히 말하면 산성도 조금 끼고 있고 평지도 같이 있는 평산 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근데 주로 산성은 적고 평지는 넓은 곳으로 되어 있었죠.

금정산성의 재 수축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금정산성은 약 100년 간 방치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던 1806년, 당시 동래부사였던 오한원이 동래 부성의 협소함과 국방경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금정산성의 재 수축을 상소를 올리면서 대규모 축성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사는 1807년 9월에 시작되어 1808년 가을까지 진행되었는데 동문과 서 남루 및 창고를 건축하고 전체 성첩을 수축한 뒤, 완료되었습니다. 동래부사의 임기는 원래 2년 6개월인데, 오한원은 금정산성 수축 공사를 마치기 위해 3년 동안 부임하였습니다. 이는 금정산성의 공사를 마치기 위해 이임을 할 수 없게 한 조선 정부의 명령도 있었지만 자신의 상소를 책임지기 위한 본인의 의지도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산성의 부속건물들이 파괴되고 일부는 몰수당하며 과거의 모습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후 1972년부터 복원 사업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며 현재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근데 지금 금정산성은 대한민국에서 산성으로 제일 긴 산성입니다. 약 18km가 되는 정도입니다. 이 부설비는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동래부사 오한원이 훼손된 금정산성의 개축을 기념하기 위하여 1808년(순조 8)에 세운 비석입니다.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파서 비 좌를 대신한 까닭에 이전되지 않았고 덕분에 동래부에서 금정산성으로 가는 진입로의 위치를 시사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현재 이 부설비는 금정초등학교에서 서쪽으로 약 200m 정도 가면 비석을 볼 수가 있습니다.

부산에 축조된 왜성

지금까지 조선의 여러 성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왜성으로 함께 걸어가 보겠습니다. 왜성은 말 그대로 왜, 즉 일본이 우리나라에 만든 성을 말합니다. 당연히 왜성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시기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대부분 도시개발과 무관심으로 방치되거나 약간의 흔적만 남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성은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축조에 동원된 인력은 대부분 무고한 조선인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왜성의 정의와 성격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이 축조한 성을 말합니다. 왜성은 군수물자의 보급 및 군사정보 전달을 위해 축조되었습니다. 왜성의 대부분이 남해안에 위치하는 것은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해 공격 전선의 북상에 한계가 있었고, 본국으로 가는 퇴로의 확보 등을 위해 일본과 가까운 남해안 일대의 군사요충지에 성곽을 축조한 까닭입니다. 부산지역에는 증산 왜성을 비롯해 자성대 왜성, 동래 왜성, 구포 왜성, 죽성리 왜성, 임랑포 왜성, 죽도 왜성, 가덕도 왜성, 동삼동 왜성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왜성의 제반 사항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부산 인근의 동남해안을 기점으로 경상도 서생포에서 거제도에 이르기까지 약 20개의 왜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정유재란 시기에는 동쪽으로는 울산, 서쪽으로는 순천까지 전선이 확대되면서 울산, 순천왜성을 비롯한 8개의 왜성을 새롭게 축조하였습니다. 왜성은 지형을 이용한 복잡한 형상과 배치를 이루고 있는데 가장 높은 곳인 주곽을 중심으로 점차 낮게 다단식으로 구분하여 방어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왜성의 출입구를 호구라고 하고, 왜성의 성벽은 60~70도 정도 기울어지게 쌓는데 이는 조선의 성과 가장 차이를 보이는 왜성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일본은 성을 쌓을 때도 돌을 다듬어서 성을 쌓지만 우리나라 조선시대 성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도 큰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나와 있는 사진은 남해안 왜성 분포도인데 육지에서는 명군의 참전으로 점차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일본군은 남해안에 왜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이미 제해권은 이순신이 장악하였기에 일본군은 왜성에 웅거 하며 후퇴할 날을 기다렸습니다. 남해안쪽으로 성들이 쭉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산의 왜성

증산 왜성은 동구 좌천동 증산 체육공원에 위치한 왜성이며 임진왜란 당시 모리 데루모토가 축조하였습니다. 1592년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후, 성의 서북쪽에 있는 증산에 쌓은 왜성인데 조선에 만들어진 왜성 중 가장 먼저 축조된 것으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성대 왜성은 부산 진시장 건너편의 자성 대산에 위치한 왜성으로 증산 왜성의 지성으로 사용되었으며 모리 데루모토가 축조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부산진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다음에 구포 왜성은 왜군이 낙동강 수로 확보와 인근의 김해 왜성, 양산 왜성의 연락과 상호지원을 위해 고바야카와 다치바나 무네시 게 등이 조성한 왜성입니다. 특히 구포 왜성은 호포리 왜성, 양산 왜성과 함께 낙동강 수로를 통해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요지에 축조된 왜성입니다. 이 외에도 부산에는 죽성리, 죽도, 가덕도, 동삼동 왜성 등이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왜성들은 과거에는 침략전쟁의 흔적이라는 이유로 방치되고 등한 시 되었지만 최근에는 가슴 아픈 역사를 재조명하고 일본과 조선의 문화교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때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없고 지금 축대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