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산, 역사, 지리, 역사적 사건

기유약조의 체결과 부산 조선통신사

도르레차 2022. 7. 24. 20:47

기유약조의 체결과 부산 조선통신사

기유약조의 체결과 부산 조선통신사
기유약조의 체결과 부산 조선통신사

국교재개와 기유약조의 체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자신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내전을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완전히 몰아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시 조선과 국교를 재개하려 합니다. 여러분도 친구와 다툰 뒤 화해를 해본 적이 한 두 번쯤은 다 있겠지요? 어땠나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감정도 그러한데 하물며 수천만의 사람이 살고 있는 국가와 국가 간의 화해는 어땠을까 짐작이 가겠죠.

종전과 국교재개

조선 건국 후, 200년 동안 지속되던 일본과의 외교는 7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완전히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의 실권을 장악하고 결국 1603년 쇼군에 오른 뒤, 도쿠가와 막부를 열었습니다. 쇼군에 오른 이에야스는 자신에게는 전쟁의 책임이 없음을 강조하고 조선 정부에게 국교를 재개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요청에 조선정부는 사명대사가 포함된 회답겸 쇄환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내실을 파악하고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을 송환하게 하였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결국 일본의 정권을 장악하고 조선과 수교를 요청했습니다. 결국 그의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쇼군에 오른 뒤, 조선과 일본은 국교를 재개하게 됩니다. 결국 그 당시에 국교를 재개해야 하는 것은 일본은 국내 안정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평정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다이묘들의 저항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조선과의 관계도 이때 평화를 유지해야 만이 자기가 완전한 권력을 지니기 유리했고 우리나라에도 북쪽의 여러 민족들이 침략의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대외적으로 평화가 필요했던 겁니다. 두 나라가 결국 평화와 안정을 매개로 해서 국교가 재개되게 된 겁니다.

기유약조의 체결

다음은 기유약조의 체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회답겸쇄환사를 통해 피로인들이 송환되자 조선정부는 전쟁기간에 선릉(성종의 능)과 정릉(중종의 능)의 도굴을 시도한 인을 색출하여 보내라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이에 쓰시마 도주는 2명의 범릉적(능을 범한 도적)을 보냈으나 진위여부는 지금도 알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의 성의에 결국 조선 정부는 선조 40년 1607 이죠. 약 200명으로 구성된 회답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저의를 확인하고 결국 일본과의 국교를 회복했습니다. 이로써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양국의 국교가 회복되었으며 2년 후인 광해군 원년(1609) 6월 28일, 선위사 이지완과 일본국사 겐소오가 부산에서 합의하여 기유약조를 체결하였습니다.

기유약조의 내용

기유약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쓰시마 후추 번주에게 내리는 쌀은 모두 100석으로 한다. (이것을 세사미두라고 합니다) 쓰시마 후추 번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한다. 관직을 제수 받은 자는 1년에 한 차례씩 조선에 와야 한다. 조선에 들어오는 모든 왜선은 쓰시마 도주의 허가장을 지녀야 한다. 쓰시마 후추 번에서 도서(圖書)를 만들어 준다. 허가장 없는 자와 부산포 외에 정박한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 왜관에 머무르는 기간을 쓰시마 도주의 특송선 110일, 세견선 85일, 그밖에는 55일로 한다. 이러한 약조의 내용 외에도 이후 일본 사신은 한양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부산에서 왕의 전패를 모시고 진향숙배 하는 선온례를 하게 됩니다. 선온례라고 하는 것은 선온을 전할 때에 행하는 의식을 말하고 선온은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주는 술이나 음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선통신사의 재개

다음에는 조선통신사의 재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화해라는 것은 한 두번의 대화로 덜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와 국가 간에는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고 이러한 점들은 단순히 고개를 돌리고 서로를 적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등을 돌려 앉아 서로를 적대 시 하기에는 너무나 가까웠던 두 나라, 일본과 조선은 서서히 몸을 돌려 서로를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조선통신사가 바로 그 시작이었습니다.

조선통신사의 요청과 파견

조선통신사의 요청과 파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607년 전후 처음으로 회답사가 파견되고 1609년 기유약조가 체결되면서 조, 일 양국의 관계는 정상화되었습니다. 이로써 양국은 경사스러운 일이나 외교문제가 있을 때마다 서로 사신단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특히 조선에서 일본으로 향한 사신단을 조선통신사라고 불렀고 반대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온 사신은 일본국왕사, 차왜(差倭)라고 불렀습니다. 16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을 함락해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킨 뒤, 조선통신사를 요청했습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도 이는 경사스러운 일이라 판단하여 2년 뒤인 1617년 400명으로 구성된 2차 회답사를 파견하였습니다. 2차 회답사는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다타를 만난 뒤, 피로인 150명과 함께 조선으로 귀국됩니다. 이후 양국 사이에는 쇼군 습직(襲職)이 있을 시, 쓰시마 도주의 요청으로 조선통신사가 파견되는 것이 상례가 되었습니다. 조선통신사는 순조 11년(1811)에 이르기까지 약 200년 간 12차례에 걸쳐 파견되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사진은 조선통신사사내조도라는 것인데 이 그림은 1748년 무렵 일본인 화가 하네카와 도에이가가 조선통신사절단을 그린 그림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습직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조선통신사를 구경하기 위해 늘어선 일본인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조선통신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통신사와 부산

다음에는 조선통신사와 부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한양을 출발한 통신사 행렬이 에도까지 왕복하는데 약 6개월에서 1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한양에서 부산까지는 육로를 이용했고 부산에서 오사카까지는 해로를 이용했습니다. 통신사는 정사, 부사, 종사관 이하 약 500명 가까운 인물이 편성되었습니다. 이들이 타는 배는 기선과 복선으로 구성되었는데 기선은 다시 정사선, 부사선, 종사관선으로 나뉘어 집니다. 복선은 화물선으로 각종 예물과 화물 등이 실려 있었습니다. 통신사 일행의 준비가 완료되면 길일을 골라 영가대에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해신제를 지낸 뒤, 항해에 나서게 됩니다. 다음 글은 영가대에서 지냈던 해신제에 관한 기록 중 일부입니다. “아아, 여섯 척 배에 탈 사람들아. 이 행차에 대하여 신명에게 명을 청하려 한다. 지금 관직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이하 창 든 사람, 서리, 하인, 뱃사람 등 제사에 참여하고 하지 않는 것을 막론하고, 무릇 우리 배를 같이 타고 일본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각각 이틀 동안 경계하고 하루 동안 목욕재계하라. 술과 담배를 끊고 파와 마늘 등을 먹지 말고, 풍악을 듣지 말며, 감히 사사로이 낄낄대거나 울부짖거나 초상에 가거나 문병하지 말라. 밤낮으로 반드시 깨끗하게 지내어 제사의 일을 성취하도록 하라. 맹세대로 하지 않으면 저 해가 지켜보리라. ” 이날 저녁부터 전사관이 여러 집사들을 거느리고 제단에 가서 의식을 전하고, 이어서 영가대에서 합숙하며 재계하였습니다. 이 글은 그당시 조선통신사에 다녀왔던 신유한이라는 분이 썼던 해유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1872년 지방지도 중 부산진성과 영가대의 모습인데 자세히 보면 뒤쪽에 부산진성이 있고 앞쪽에 영가대가 별도로 보이죠. 그 다음에 동래부사접왜사도에도 부산진성과 영가대가 뚜렷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부산진 매축 전 영가대의 모습인데 아주 평화롭고 고요한 지역에 바로 영가대가 들어서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경부선 철도공사 이후에 철도가 깔린 영가대의 모습이 남아있습니다. 사실 영가대는 1614년 경상도관찰사 권반이 전선을 감추기 위해 선착장을 만들었을 때 파낸 흙이 언덕을 이루자 그곳에 망루를 겸해 세운 8칸의 누각입니다. 사실 영가는 것은 권반의 고향이 안동이었는데 그 당시 안동의 이름이 영가입니다. 영가라는 것은 약간 높은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1906년에 영가대 앞 선착장은 경부선 철도 공사 때 일본인들이 매축하였고, 영가대는 전차 선로를 만들면서 부산의 일본 거류민 단장을 지낸 오이케 타다스케의 별장입니다. 이게 능풍장으로 옮겨졌는데 지금은 흔적이 사라지고 없습니다.